2019.3.19~2019.4.9 22일간의 중남미 여행기 12편

페루  마추비추

가이드 박경숙사장(꼬꼬투어)  T 51-444-4011-2 HP 51-976-170-652

페루 마추비추   2019.3.29 여행 11일째

우르밤바에서 기차를타고 1시간30분에 걸처 우르밤바강을 끼고 열차는 하염없이 달린다

강의 물이 심상치 않다. 지난밤에 비가많이 내렸나보다 흙탕물로 내려가는 물이 수량이

대단하다. 마치 폭포가 용을 이루는것 같다.

열차는 마추비추에 도착하여 우리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마추비추로 마을버스 모양 비슷한

버스로 20여명이 타고 올라간다 . 점심을 먹고나니 왠비가 그리 많이 오는지 모두들 우비를 입고

단단히 준비를 한다.

나는 운전기사의 배려로 바로 맞은 편에 앉을 수 있었다 기념으로 쪼코랫과 기념 볼펜을 주니

기사가 내가 사진을 많이 찍으니 눈치를 보며 운전을 한다 비디오 촬영시는 아예 차를 멈춘다.

너무 감사하다 차는 어느듯 정상을 향하여 가는 도중 기사가 몇번이나 차를 세워 미안한 마음이 

영 머리를 떠나질 않는다. 정류소 도착을 조금 남겨놓고 나보고 사진을 찍으라고 보니 마추비추

가 보이고 전망이 좋다 연신 샷다를 누르고 나니 차가 떠나서 정류소에 도착한다. 

자 지금부터 마추비추 여행을 시작해보자.


페루, 더 나아가 남아메리카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유적지인 마추픽추는 하이램 빙엄(Hiram Bingham)이 1911년에 발견하기 전까지 산세 깊숙한 곳에서 잠자고 있었다. 스페인 정복 이후 대부분 파괴된 잉카 제국의 유적들과 다르게 원형 가까이 보존된 채로 발견되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마추픽추는 ‘잃어 버린 공중 도시’로 불리며 이를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여행자들이 모여들고 있다.



마추픽추는 잉카인들이 세계를 보는 방식인 상과 하, 우측과 좌측, 남성과 여성, 시간과 공간의 두 기준에 따라 절묘한 위치에 의도적으로 건설되었다. 마추픽추는 와이나픽추(Huayna Picchu)라는 원뿔 모양의 봉우리와 마주보고 있는데 와이나픽추는 잉카인들의 토템으로 신봉하는 두 동물의 형태를 갖고 있다. 와이나픽추 봉우리를 앞에서 보면 퓨마의 형상으로 보이며 좌측에 있는 세 개의 작은 봉우리는 새(콘도르)가 날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잉카인들에게 와이나픽추는 지상과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신성한 산으로, 그곳에서 바라보이는 대지에 신성한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마추픽추를 방문하려면 쿠스코에서 우르밤바를 거쳐 오얀타이탐보(Ollantaytambo)에서 기차를 타야 한다. 오얀타이는 파차쿠텍왕 시대의 장군으로 왕의 딸과 사랑에 빠져 오얀타이탐보로 피신했다. 화가 난 파차쿠텍은 수차례에 걸쳐 오얀타이 장군을 공격했으나 번번이 격퇴되었고 결국 사랑을 인정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은 마추픽추로 들어가는 길목인 신성한 계곡의 입구인 동시에 군사적 · 전략적 요충지였다. 오얀타이탐보에는 군인들이 묵었던 숙소 · 종교시설 · 창고와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고 마추픽추와 유사한 형태이다. 기찻길 옆으로는 아마존강의 원류인 우르밤바강이 흐른다.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마추픽추로 들어가다 보면 유적지 입구에 황금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탐험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빙엄의 표지석이 있다.

마추픽추에는 평야가 적었지만, 잉카인들은 산비탈을 계단처럼 깎아 옥수수를 경작하여 오랜 세월 동안 넉넉히 먹고 살았다. 구리를 쇠만큼 단단하게 제련해 썼으며 그 고대의 방법은 지금도 풀리지 않고 있다. 이렇듯 강성했던 잉카 제국은 겨우 100여 년 만에 스페인 군대에 의해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들의 역사 속 문명과 패망, 저항에 얽힌 수많은 사연을 집약해 보여 주는 잉카 최대 유적이 바로 안데스 산맥 밀림 속, 해발 2,400m 바위산 꼭대기에 남아 있는 공중 도시 마추픽추이다

이 도시는 1911년 발견되기 전까지 수풀에 묻힌 채 아무도 그 존재를 몰랐기에 "잃어버린 도시" 혹은 산과 절벽, 밀림에 가려 밑에선 전혀 볼 수 없고 오직 공중에서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하여 "공중 도시"라고 불린다. 페루는 수도 리마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도시가 안데스 산맥 고원지대에 자리를 잡고 있다. 특히 마추픽추는 산꼭대기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구름이 산허리에 걸려 있을 때가 많아 산 아래에선 이 도시 존재를 확인할 길이 없다.

[El Condor pasa(철새는 날아가고)], 천상의 음률이 공중 도시의 신비를 감싸고 돈다. 운무(雲霧)에 휩싸여 더욱 신비롭다. 잉카인들의 한이 서린 페루 전통민요가 원주민 악기 삼포냐의 음률로 울려 퍼지는 순간, 오랜 역사의 추억을 가슴에 간직한채 공중도시를 뒤로하고 쿠스코로 향하게 된다. 잉카 문명의 영원한 수수께끼 마추픽추는 왕조의 슬픔과 인디오 문명의 전설을 남긴 채 우리의 뇌리 속에 영원한 수수께끼로 잠들고 있다.


전통시장

비가많이온 터라 강물이 많다 다리를 건너 식당으로

오른쪽이 식당이 있는곳

즐비한 쇼핑가계들

식당에서 메뉴를

과일과 고기

기념으로 알카파 마후라 몇개를 저렴한 가격으로 1개 15불

기념품을 사고 인정샷

마추비추가는길

정상에 오니 비가그친다

마추픽추는 페루에서 잉카 문명의 흔적이 가장 완벽하게 남아 있는 세계적인 유적이에요. 2,300미터의 산 정상에, 험준한 계곡과 가파른 절벽에 기대어 숨어 있는 신비의 공중 도시 마추픽추!


비도그치고 구름도 사라지고


중간에 비추비추가보이는곳에 차를 세우고

역시 3대가 복을 받아야 비를 피하지



버스 정류소


마추픽추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11년 미국의 하이람 빙검이라는 청년에 의해서였어요. 그는 아주 높은 산꼭대기에 환상적인 잉카 도시가 있다는 오래된 기록을 보고 찾아 나섰다가 발견한 거였지요. 마추픽추를 발견한 그는 이렇게 외쳤어요.
“와! 드디어 금의 도시 비트코스를 찾았다!”


비트코스는 잉카 제국이 어마어마하게 보유했던 금은보화가 감추어진 마지막 도시라고 알려진 곳이었고, 빙검은 그곳을 찾았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물론 황금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세계는 잉카 제국 멸망 후 340년 동안 버려졌던 황금보다 더 귀하고 값진 잉카 제국의 유적을 만날 수 있었지요.

꼬불꼬불한 산을 돌아 돌아 산 정상에서 만나게 되는 마추픽추는 높이 5미터, 두께 1.8미터의 성벽으로 두텁게 싸여 있는 요새 도시예요. 잉카 인들은 인구 2만 명이 사는 게 가능했다는 이런 거대 도시를 어떻게 산꼭대기에 정교하게 만들어 놓았을까요? 그리고 왜 만들어 놓았을까요?


새로 복원된 가옥들

마추픽추는 가운데 있는 대광장을 중심으로 상부와 하부로 크게 나누어져 있어요. 지금 우리가 사는 현대 도시 못지않게 여러 가지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지요. 궁전이 있고,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고 의식에 사용되는 의례품을 저장하는 저장소가 있었습니다. 또 학교와 공장, 사람들이 살던 집, 묘지, 산을 계단식으로 깎아 옥수수와 약초를 재배하던 경작지도 있었지요. 천체 관측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건축물도 빼놓을 수 없어요.

사람들이 살았던 집을 좀 더 자세히 보면 안데스 고원 지대의 둥근 가옥과는 달리 벽돌로 쌓은 양쪽 벽 위에 ∧자형으로 초가지붕을 얹어 놓았어요.


그리고 왕의 궁전이라 불리는 건물 밑은 감옥으로 사용된 흔적도 발견되었습니다. 문 입구에 나 있는 두 개의 구멍이 손을 넣어 채워 두는 장치로 밝혀졌거든요. 잉카 사회의 주요 범죄는 도둑질과 거짓말 그리고 게으름이었어요. 특히 생활환경이 어려운 산 정상의 마추픽추에서는 자기가 맡은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은 전체 공동체의 생존 자체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무거운 벌로 다루어졌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마추픽추의 높은 산꼭대기에는 과학적으로 잘 만들어진 수로와 17군데나 되는 양수장도 보입니다. 산에서는 물이 귀하기 때문에 한 방울의 물도 헛되이 버려지지 않도록 식수로 사용할 물과 농사짓는 데 쓸 물을 나누고 재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지요. 정말 잉카 인의 지혜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답니다


마추픽추는 에스파냐에 정복된 이후 5세기 동안이나 정글 안에 파묻혀 있었음에도 건물들의 지붕을 제외하고는 거의 훼손되지 않았다. 울창한 수림과 뾰족한 봉우리들, 신성한 계곡으로 불리며 우기에는 통과할 수 없을 만큼 지형이 험한 퐁고 보에니케 골짜기가 마추픽추를 외부세계와 격리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마추픽추는 태양신의 처녀들, 즉 ‘아크야’를 위해 건설한 것이라고 한다. 마추픽추를 건설하는 데 사용된 돌들은 600미터 아래의 깊은 골짜기에서 채취한 것인데 운반도구도 제대로 없었던 잉카인들은 악전고투했을 게 분명하다.


빙엄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이래 마추픽추는 차츰 비밀이 벗겨지고 있다. 마추픽추는 제례의식의 중심지였고 약 1200명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마추픽추는 테라스 형태의 농업구역과 도시구역으로 나눠져 있는데 계단식 밭에서는 옥수수와 감자, ‘안데스의 초록빛 황금’인 코카 잎을 재배했다. 가축도 따로 길렀다.





달의 신전은 유적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와이나픽추 중턱에 위치한다. 천연동굴을 이용해 다섯 군데의 벽감을 만들고 부조를 장식했다. 신전 안에는 거대한 바위의 가운데를 파서 만든 옥좌가 있지만 전설 속의 황금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빙엄은 제단 구역에서 많은 인골을 발견했는데 대다수가 태양신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선택된 여자들이었다. 발견된 175구의 미라 중 80퍼센트가 여자였고 나머지 20퍼센트는 사제와 아이들이었다. 빙엄은 현장에서 잉카제국을 상징하는 도자기 · 금속 · 섬유 등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마추픽추가 어떤 정책적인 결단(군사 전략적 측면, 실용성 미비)에 의해 포기되었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하부에서 수많은 도자기 파편을 발견했는데 이는 희생 또는 제사의 의식 중에 도자기를 떨어뜨린 것으로 추정한다.












여행온 브라질인과 함께 사진을





전망대를 간다고 나셨지만





복원된 기옥들




집안에서 바라본 전망


200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유적지의 대부분은 가옥이나 저장고인데 지형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했고 화강암으로 건설했다. 출입문은 사다리꼴이고 지붕은 3500미터 이상의 고산지에서만 자라는 이추(Ichu)라는 짚으로 만들어 덮었다.(현재 복원된 건축물의 지붕도 이추로 덮었음) 정방형의 공동 마당을 가운데 두고 열 채씩 무리로 지어진 2층집들은 좁은 도로나 다소 돋운 골목으로 연결되어 있다.


밑에는 우르밤바강이 흐르고





전망대를 간다고 올라 왔는데 이문을지나면 경비가 지키고 서명을 하고 시간을 적고 통과해야한다

 올라가는 사람은 꼭이름을적고가야 한다 그리고 내려올때는 시간을 적고 통과해야한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시간에 쫒겨 더이상가지 못하고 내려가야만 했다.




잉카인들은 신성한 도시의 모든 시설들을 어떤 형상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배치했다. 그것은 날개를 활짝 펴고 날고 있는 새의 모습이다. 와이나픽추에서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인간들은 무질서와 방탕에 빠지기 쉬우므로 태양이 다양한 색깔의 깃털을 가진 새를 보내 영혼들을 위무해준다고 한다.




 산업지구

채석장

10.왕궁,11. 의례용샘물, 12.태양신전, 13 능묘, 14 왕녀의 방

15. 콘도르사원, 16. 곡물저장소

첫번 째의 벽은 삭사이와만이나 쿠스코에 있는 잉카의 신전에서 본 벽처럼 벽전체가 종잇장 한 장 들어갈 수 없이 정밀하게 맞춰진 벽인데 마추픽추에서는 신전 건물에만 적용된다.

두번 째의 벽은 아랫부분은 신전과 비슷하게 가공된 벽이 아래에 있고 윗부분은 덜 가공된 돌을 쌓은 것인데왕궁과 귀족들의 가옥에 적용되었다


그리고 벽 전체를 가공이 되지 않은 돌로 쌓은 것은 일반 서민의 집이라고 한다.

잉카인들이 몽사를 짓던 밭

마추픽추를 두고 사람들은 많은 의문을 품었습니다. 수십 톤은 되어 보이는 돌들을 잉카 인들은 어디서 어떻게 옮겨 왔는지, 산꼭대기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무얼 먹고 살았는지 말이에요. 워낙 풀기 어려운 문제이다 보니 한때는 마추픽추가 외계인의 지구 기지였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었답니다. 금속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정교하게 돌을 잘라 건축 자재로 사용한 것도 외계인이 레이저로 잘랐기 때문이라고도 하고요.

이것 말고도 마추픽추가 주는 의문은 또 있어요. 마추픽추에서 100구의 미라가 발견되었는데 모두 여성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흔히 남자들은 공중 도시 마추픽추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산 아래에서 스페인 군대와 싸우다 전사하고, 사제로 선택된 ‘태양의 처녀’들만 남아 마추픽추와 운명을 같이 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어요.





주신전

앞마당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 마추비추도 앞으로는 통제속에 예약된 인원만 통과할것 같다

수공업지구

복원된 가옥들


여기의 명물 알카파


저산이 모두 밭이네




해시계

수로와 양수장 말고도 마추픽추에는 놀랄 일이 많이 있어요. 마추픽추의 상부 지역 대신전 앞 네모난 돌기둥 위에 서 있는 해시계가 그 하나입니다. 돌기둥 모서리를 잇는 대각선 위로 6월의 동지각주1) 에 태양이 정확하게 통과하도록 설계되어 있지요. 또 다른 것은 신전 주위 곳곳에 보이는 산의 형상을 본뜬 돌 조각들입니다. 바로 뒤로 보이는 아이나비추 산을 비롯한 마추픽추 주변 산을 축소한 것들이라고 해요.

마추픽추에서 눈에 띄는 것은 천문관측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건축물이다. 하나의 거대한 돌을 깎아 만든 인티와타나(Intihuatana, 케추아어로 태양을 끌어들이는 자리)는 해시계와 유사한데 동짓날(남반구에서는 여름) 하루 동안 사제들은 여기에서 제물을 바치며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잉카인들은 태양이 두 개의 ‘의자’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북쪽의 주의자와 남쪽의 보조의자가 그것이다. 태양이 남쪽 의자에 자리 잡을 때인 하지가 한 해의 시작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잉카인들은 인티와타나에 이마를 대면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고 믿었다.



공동 마당에는 커다란 맷돌, 부피가 큰 농기구, 연료로 사용하는 라마의 배설물 저장소가 있었고 ‘추뇨(잉카인들의 주식으로 감자 말린 것)’를 만들기 위해 태양과 서리에 번갈아 노출되도록 감자를 널었다. 말린 고기 등은 줄에 매어 집 바깥에 매달았다.


왕의 무덤

종교 건축물은 주 광장 둘레에 축조했다. 정교한 부조가 새겨져 있고 반원형의 탑이 있는 태양신전,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제1신전 그리고 ‘왕의 묘’가 그것이다. 왕의 묘는 잉카 최고의 신에게 헌정된 숭배의 장소로 추정하며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잉카인들의 믿음을 표현하는 세 계단이 있는데 이는 지하(죽음) · 지상(현생) · 하늘(신)을 의미한다. 신전 근처의 왕의 궁전에는 식당과 거실 등이 있으며 마추픽추에서 유일한 화장실이 있다.

여기 가파른곳에 밭들이 농사를 어떻게 지웠을까

고지의 마추픽추에서는 물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잉카인들은 식수와 농사에 필요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지하수가 나오는 곳에서부터 돌을 이용하여 고랑을 만들었다. 잉카인들의 돌 다루는 뛰어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농사대신 잔디가 그  대신하고 있다.

일부 복원된 가옥들

일부 복원된 가옥 내부


우르밤바강이 많은 수량을 가지고 흐른다

마을에는 시장과 호텔들이 여행객들을 반기고

쇼핑도하고 알카 파가 최고인기


저녁식사 구이 이것은 40불인데 2인이나누어 20불씩 먹었다 전문집이 아니라 일행들은 익지않아 먹지도 못하고 돈만냈다.

풍요로운 농촌 배경으로

기차를 타고 율란타이탑보역으로 간다 그리고 다시쿠스코로

역시 기차안에슨 차한잔과 쪼코랫 그리고 과자를 기념으로 준다

우리 가이드 박경숙사장

쿠스코 여자 경찰





마추비추를 걸어서 트래킹하는 코스 많은 사람들이 걸어서 오른다

여기 젊음이 좋다 걸어서 오르는 사람들



계곡의 경사가 심해 눈앞이 아찔아찔 그래도 걸어서 버스는 요금이 비싸니 ....





걸어서 오르는 계곡 사이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다음 13편 다시 쿠스코에서 출발하여 볼리비아 라파스거쳐 우유니로간다.

                          


 

 


2019.3.19~2019.4.9 22일간의 중남미 여행기 11편

페루 우르밤바에서 마추비츄가는길

가이드 박경숙사장(꼬꼬투어)  T 51-444-4011-2 HP 51-976-170-652

페루 우르밤바   2019.3.29 여행 11일째


쿠스코에서 늦게까지 푸카푸카라를보고 다시 우르밤바로간다

여기서는 버스로이동하여 마추비츄까지 가기때문에 큰가방은 쿠스코 호텔에 맞겨두고 우르밤바에서하루밤을 자기 때문에 가방을 최소화하여 간단한베낭에 넣고 작은버스로 두대에 나누어 타고 간다.

우르밤바에 도착하니 밤이 늦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바로 호텔로 향했다.


쿠스코에서 32km 떨어진 삐삭(Pisac)은 해발 2,700m의‘신성계곡(神聖溪谷)’속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다. 주변은 높은 산봉우리들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가운데로 우르밤바(Urubamba) 강이 흐르는데 아직 작은 개울정도이다. 이 강이 다른 지류들과 합쳐져 브라질에 이르면 저 거대한 아마존(Amazon)이 된다고 한다.


다음날 우르밤바를 출발하여 마추비츄로 간다 가는길목에 오얀타이 탐보을 지나간다

자 같이 떠나보자.



우루밤바는 케추아 어로 "성스런 계곡"이란 뜻인데,쿠스코에서 약 80km 떨어진 거리에 있는 조그만 도시로서, 과일과 야채가 풍부하게 생산되는 풍족한 지역.



 안데스 골짜기로 우루밤바 강이 흐르고 그 주변으로 잉카의 오래된  유적과 인디오 촌락들이 있으며, 양 옆으로 유칼리 나무가 풍치를 돋구어 주고 있다.

이곳은 표고(2,863m)가 쿠스코 보다 낮아 숨쉬기가 한결 수월하다,

나는 별 느낌이나 차이가 없었지만---.

 마추픽추에 가기위해 꾸스코에서 이곳 우루밤바까지 버스로 이동한 후 얀따이땀보 역에서 기차에 탑승 1시간 30분 가서, Aguas Calientes에서 마추피추행 버스를 갈아타고 꼬불꼬불한 산악도로로 돌아 올라가야 한다. 



마추픽추로 가려면 쿠스코에서 출발하는 마추픽추행 기차를 타야하는데 이곳 삐삭을 지나가지 않기 때문에 기차역이 있는 오얀따이땀보(Ollantaytambo)까지 2시간 정도 버스로 이동하여 9시에 지나는 기차를 타야 한단다. 새벽 6시에 일어나 호텔에서 준비한 새벽 아침을 먹고 관광버스로 우르밤바 강줄기를 따라 내려간다. 마추픽추를 본다는 설렘으로 머리 지끈거리던 것도 어느 정도 가신듯 하다.

한 시간쯤 달리면 우르밤바(Urubamba)라는 작은 읍내를 지난다. 달리는 내내 좌우로는 고개를 젖혀야 봉우리가 보이는 산들이 첩첩이 둘러싸여 있고 옥수수 밭, 코카 밭과 이름 모를 꽃들로 뒤덮인 강변이 쉴 사이 없이 차창으로 스쳐지나간다.

  이따금씩 나타나는 작은 마을은 볼품없는 집들 사이로 새까만 얼굴, 자그마한 키에 목이 유난히 짧고 가슴통이 큰 인디오들이 커다란 보따리를 목에 걸어 등에 짊어지고 순박한 얼굴로 쳐다본다. 남녀 구분 없이 목이 짧고 가슴통이 큰 것이 특징인 인디오들은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아기 때는 그렇지 않은데 고산지대의 희박한 산소 때문에 심호흡을 많이 하며 자라서 그런 체형이 된다고 한다


지나는 길에 있는 스카이호텔.

절벽에 매달려 있다. 여기를 올라가기 위해서는 입구에서 등산장비를 빌려준단다.

그걸 착용하고 줄이 연결되어 있는데 그걸 잡고 산악등반을 해서 올라가야 한다.

공중에 뜬 집에서 잔다는 건 정말 아찔!!!  

이캡슐호텔은 높이가 122m   1박에 30만원 6개월전에 예약을 해야 가능하다고


이캡슐호텔은 높이가 122m   1박에 30만원 6개월전에 예약을 해야 가능하다고

절벽에 매달려 있다. 여기를 올라가기 위해서는 입구에서 등산장비를 빌려준단다

높이가 122m 인 캡술호텔 6개월전 예약은 필수

우르밤바는 별 특징이 없는것 같은....

안데스의 계곡 치고는 크지도 작지도 않다. 계곳의 바닥엔 편안한 농지가 있고,

적당한 크기의 강,밭,어울리는 산세, 이것들의 조화가 너무나 어울려서 각기 별로 튀어 보이지 않는...그러나 자세히 뜯어보면 너무나 아름다운, 산이 높아 설산이며, 그 허리에 구름있고,산 아래는 마을있는 그런 곳.

<우르>는 황토, <밤바>는 평지라는 뜻의 께추아(잉카 공용어)어 인데, 페루의 많은 지명이 께추아어 이다.

다음 유적지인 산비탈에 있는 소금유적지

 약 4000개정도의 밭이 있다고 하는데, 바다가 융기되어 생성된 염전이 아니라고 합니다. 조사를 하다가 유적지가 사라질까봐 지질 조사도 안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 그리고 색깔이 핑크색을 띠고 있고 우리는 먼발치에서만 보고 사진으로 대하고 말았습니다


있다고---.소금 광산은 후자에 속한다.

소금광산 전경

 

한때 한국에서 웰빙 소금이라고 3kg 짜리 한봉지에 2만8천원인가에 판매를 했는데 여기 소금광산에서는 1kg 에 한국돈으로 150원정도이다.해발 3,500m 대의 유일한 천일 염전으로, "마라 (Mara)"라는 마을에 있다.

 고산지대에서 더러 볼수 있는 염호(鹽湖)나 소금사막은 어떻게 형성이 됐을까?

2가지 경우가 있다고---.대륙판 해저지층이 해양판과 충돌로 솟아오르면서 떠안고 온 바닷물이 갇히고 증발량이 많으면 소금 사막이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 사막"같은 경우고,증발량보다 강수량이 많아서 담수호가 되기도 하는데 이는 페루의 "티티카카 호수"가 그 좋은 예이다.

또 다른 경우는 빗물에 녹은 염소나 나트륨 이온이 고지대 습곡에 고여서 증발되면서 소금 사막 또는 염호가 되기도 하는데 이 쿠스코의 소금 광산은 후자에 속한다.




오얀따이땀보 마을 사람들은 캠핑장비를 빌려주고 등산가이드도하고 기차를 타지 않고 트래킹으로하는 사람들을 위한 장비들을 빌려주고

드디어 오얀따이 땀보 동네로 들어왔다.

피사로가 허수아비로 내세운 왕 '망코 잉카'는 이용당한 것을 자각하고 수도 꾸스꼬를 버리고 일전을 준비한 곳이 바로 오얀따이 땀보. 전력을 가다듬은 망코 잉카가 지형을 이용해 스페인군을 격퇴시킨 의미있는 곳이다.

그러나 해가 지자 해를 숭배하는 잉카족이 공격을 멈추는 바람에 결국 피사로가 승기를 잡는다.

잉카의 수도 꾸스꼬에서 80키로 떨어진 성스러운 계곡의 중심에 있는 마추픽추 들어가는 길목이다.


오얀따이땀보 마을 전경

매일 수백명의 트레일 족들이 머무는 곳이라서 인터넷과 와이 파이 등은 민박의 기본 설비에 속한다.

오얀따이땀보 가계들

오얀따이땀보 쇼핑가게들이 즐비하다

여기서 알파카 마후라를 구입하고

오얀따이땀보 마을에서 기념샷

오얀따이땀보  옛집들이 변함없이

오얀따이땀보 옛길 그대로 도로만들 길이 더무 달아서

오얀따이땀보 골목길에서 인정샷을

오얀따이땀보  현지 주민이 전통복장으로


오얀따이땀보  알파카를 파는 가계

군량을 비축한 흔적이라고---. 저온 저장을 위한 장소였다 한다.



저산비탈에서 사람들이 살았다니

현지 호텔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공중전화가 정겹게 보이고

어느 가정집 정원 아름답다

울타리에 거대한 선인장이

현대인과 전통복장을한 현지인의 모습

알카로 만든 옷들이 무수히 많으나

저렇게 높은 산중턱에서 옛날 사람들이 살았다니

집안의 제대에는 모든 성상들이 다 진열되어있다.

조상의 뼈는 물론이고 남근 성기, 규모가 컸던 콘도르의 박제상, 등등 없는게 없다.

기니 피그는 동물성 단백질의 보충을 위한 사육이다.

1. 이곳에서는 이 동물을 꾸이(Cuy)라고 부른다.

2. 쥐과에 속하여 이미지는 그렇지만 맛은 좋다.

3. 요즘은 번식을 잘하는 쥐와 트기를 만들어 파는 얌체 상혼에 조심해야 한다.

맛이 순종과 달리 질기다.

4. 기니 피그는 원래 1기니짜리 작은 돼지라는 데에서 나왔다.

5. 조리 방식은 구이가 제일 흔하고 스튜로도 만들어 먹는다.

6. 꾸이를 잡을 때에는 목과 꼬리를 당기면 금방 처리가 된다.

단 초대받은 손님도 초대자들이 관찰하는

가운데 이 작업에 동참해야 존경을 받는다.

7. 물론 맛있게 먹어야한다. 머리 부분이 일미라고 한다

기니 피그 우리도 점심시간에 먹어 보았다 1마리 가격이 40불  너무 비싸 1마리를 2명이

나누어 20불씩 아무래도 가이드가 장난친것 같다.

마추픽추를 가기위해 기차를 타러 가는길에 잉카의 전통가옥이 있는 마을에 들렀다.

그 옛날 잉카인들은 한칸으로 된 집안에서 모든 생활을 하고, 죽은 뒤에는 시신을 미라로 보관하여 모셔놓고 생활했다고 한다.

집안 곳곳에 해골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지금은 내부는 그대로 보존한 채 가게로 사용하고 있으며 관광객을 맞고 있다.


알카파로 만든 옷들 가격이 엄청싸다 허나 가방무게 때문에 살수도 없고

이곳도 수리 관개시설이 잉카시대로 부터 잘 되어있었다

이곳도 수리 관개시설이 잉카시대로 부터 잘 되어있었다.


선인장 열매도 많이 팔고

잉카에도 당연히 술이 있다. 바로 ‘치차(ChiCha)’다.

 고대 잉카제국에서는 옥수수를 삶아 이를 잘 씹어 침으로 전분을 당화시켜서 옥수수술을 빚었다고 한다.

지금은 누룩을 써서 빚는다.


길을 가다가 깃대에 붉은 꽃을 묶은 집을 보면 바로 주막집이다.

라촘바(La Chomba)라는 표지가 그것이다. 사진에서 보는 여기는 재래시장 목노주점이다.


케추아족 인디오들이 즐겨 마시는 치차는 우리의 막걸리와 비숫하다.

아니 조껍대기 술 같기도 하다. 색깔은 뿌옇고 맛은 시금털털하다.
치차의 양조법도 우리 막걸리와 흡사하다. 옥수수 가루를 쪄서 밀로 만든 누룩과 버무려 물을 붓고 독에 넣어 발효시킨다. 발효 과정에서 계피를 넣기도 하고 허브와 후추도 넣어 향을 가미시키지만,

주된 맛은 텁텁한 막걸리 그대로다. 알코올 도수는 4%에 못 미친다.

이러고 보니 마치 치차 도사처럼 써내려갔지만 모두 실전이 아니라 간접 체험이다.


눈앞에 막걸리를 두고도 마시지 않았다.

마추피추 올라갈 일을 생각하니 아무래도 술마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이들도 힘을 보강하기 위하여 요구르트 처럼 마시는 술을 눈앞에 두고도---.

여행 트래킹 안내소및 여행사


군량을 비축한 흔적이라고---. 저온 저장을 위한 장소였다 한다.



오얀따이땀보 마을 공원


오얀따이땀보  가계들


오얀따이땀보  쇼핑가계에서 모자를 구입하고

우르밤바 시장 버스를타고 지나가면서



마추비츄가는 열차표

마추비츄가는 열차표

이상한 것은 기차를 타는데 여권을 제시하란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철도회사가 영국으로

철로며 기차까지 모두 영국에서 가지고 왔다는 설명으로 기차 안은 영국이다.

  한 시간 반 정도의 거리인 마추픽추역까지 1인당 77불(10만원), 입장료 42불(5만5천원), 역에서 30분 거리인 마추픽추 산위까지 버스요금이 14불(만 8천원)로 관광객들에 바가지를 씌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랴 여기는 마추픽추인 것을

오얀타이 탐보기차역 얖 매점

오얀타이 탐보기차역 얖 매점에서 TV에서

기차역이 있는 오얀따이땀보는 옛 잉카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관광마을인 듯 마을 안길은 시멘트 포장이 아니고 납작한 돌들로 깔려있어 관광버스도 덜컹거리며 좁은 골목을 비집고 지나야 한다. 인근 언덕 위에는 스페인군에 저항하여 잉카인들이 쌓은 요새의 모습이 보존되어 있고, 또 마을 가운데로 흘러내리는 돌로 만들어진 물길은 잉카시대부터 사용되던 것으로 오늘날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고


오얀타이 탐보기차역 얖 기념품가계들

오얀타이 탐보 기차역

오얀타이탐보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1시간 30분만에 아구아스깔리엔더스 역에 도착한다

페루 레일, 잉카 레일 하이럼 빙엄 라인 등이 협궤 위를 달린다.

레일은 협궤이나 차량은 광궤 폭이어서 운행이 조심스럽다. 한시간 반을 달리는데 만년설도 보이고 절벽도 보이고 변화 무쌍하다.하이럼 빙엄 라인은 마추피추 발견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11년, 모험심에 가득 찬 미국 청년 하이럼 빙엄 3세의 성취였다.


저 레일의 소실점 속으로 마추픽추의 꿈은 마침내 몽환의 세계로 나를 이끌고 들어갈 것이다.

저 멀리 설산이 보인다

오얀타이 탐보기차역 에서 기념품을파는 노인의 모자가 을씨년 스럽다.

우리가 아구아스깔리엔데스역까지 타고갈 열차

좌석은 지정석이라

열차에서 휴식을 취하고

페루의 가이드 박경숙 사장과 같이 앉아서 가면서 인정샷

기차로 계곡을 내려가면 우르밤바 강줄기는 점점 넓어지고 수량도 많아져 제법 소용돌이를 이루는 곳도 있는데 열대우림 지역이라 숲이 울창하고 이름 모를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중간 몇 군데 기차가 정차하여 바깥을 내다보았더니 5,6 명씩의 관광객들이 기차에서 내려 우르밤바 강에 놓여있는 다리를 건너는 모습이 보인다. 잉카 트레일(Inca Trail)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설명이다. 잉카 트레일은 옛날 잉카인들이 다니던 길을 따라 걷는 것으로 여러 코스가 있는데 1박 2일에서부터 5박 6일짜리 등 다양하다고 한다. 보통 전문 가이드가 붙는데 짐을 운반해 주는 것은 물론 요리까지 해주며 요금은 2~5백 불 정도라고 한다. 꼭 한 번 다시 와서 시도해 봐야겠다. 

간밤에 비가 많이온 모양이다 우르밤바강이 온통 흙탕물이 넘쳐흐른다

우르밤바는 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잉카 유적인 <피삭>이 있고,

강을 따라 내려가면 <마추픽추>가 있으며, 강은 흐르고 흘러 <우카얄리>강이 되고, 

더 내려가면 숲과 물의 대륙 <아마존>이다. 

쿠스코 쪽엔 <모라이><친체로>가 위치해 있어서 잉카 유적으로의 이동이 편리하고,

쿠스코보다 고도가 낮아서 잠자리가 편하다.


열차가 지나가는 마을옆에 거대한 선인장이 우리를 반가고

마추비츄가는 열차에서는 차와 쪼코렛, 과자를 준다

마추비츄가는 열차에서는 차와 쪼코렛, 과자를 준다

열차가 지난는 조그마한 마을 저멀리 성당이 너무 아름답다

농사를 짓는 원주민 모습이 보여 한컷

혐퀘열차는 가면서 쉬고 운전석에는 안전을 위해 철조망이 있어 사진찍기가 힘들다

종착역을 앞두고 마추비츄 간판들이 보인다....

종착역인 마추픽추역은 계곡 가운데 아름다운 건물들로 둘러싸인 조그만 마을의 강가에 있었고 역을 나서면 엄청나게 많은 기념품 가게, 식당, 카페들이 관광객들을 맞는다.

  그리고 고개를 젖히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구름이 둘려진 까마득한 산봉우리들이 둘러싸고 있을 뿐 저 위 어디쯤 마추픽추라는 공중도시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가지 않는다.

드디어 아구아스깔리엔데스역 도착














다음12편은 드디어 마추비츄로 갑니다 기대해도 됩니다.


2019.3.19~2019.4.9 22일간의 중남미 여행기 10편

페루 쿠스코 

가이드 박경숙사장(꼬꼬투어)  T 51-444-4011-2 HP 51-976-170-652

페루 쿠스코   2019.3.28 여행10일째


리마에서 비행기로 1시간30분 페루 남동쪽 안데스 산맥에 있는 고산도시 해발3400m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  사람이 고산증을 느끼는 고도 3000m를 훨씬 높은 도시

쿠스코 비행기장에  내리자 마자 숨쉬가 힘들다 가이드가 고산증약을 먹지 말라고 한다.

일단 견디보고 도저히 못참으면 약을 먹으라고  그러나 움직임이 점점 둔해지는 것은 어찌할수 없다.

우선 점심을 먹고 잉카인들이 태양신전 코리칸차 위에 스페인 정복지들이 세운 산토도밍고 성당.

페루 쿠스코 지역의 돌로만든 정교한 방어요새 삭사이와만.1번째

잉카제국의 제레장이였던 켄코유적 2번째

성스러운샘이 흐르는 잉카제국의 목욕탕이였던 탐보마차이 3번째

쿠스코 북쪽을 지키기 위한 요새였던 푸카푸카라 4번째 을 둘러본다


16세기까지만 해도 페루는 동쪽으로 아마존, 서쪽으로 태평양, 남쪽으로 칠레, 북으로는 에콰도르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의 잉카 제국이었으며 그 중심에 쿠스코가 자리 잡고 있었다. 호전적이던 잉카인들은 타 부족의 족장을 잔인하게 죽이는 방식으로 영토를 넓혀 나갔으며, 그 결과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는 인구 20만 명이 넘는 도시로 성장했고 잉카 로드를 중심으로 수많은 유적을 남겼다. 그러나 오늘날 쿠스코는 잉카의 고도(古都)라기보다 유럽풍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스페인의 도시에 더 가깝다. 자신들의 문화를 이식하고자 했던 스페인의 파괴 행태로 잉카 신전과 건축물 대신 광장과 대성당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유심히 보면 그들이 완전히 지우지 못한 잉카 제국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옛 명성을 전한다.


리마에서 비행기로 1시간30분 쿠스코도착

페루는 리마가 교통의 요지이다

쿠스코 상공에서 찍은 시내

쿠스코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해발 3,300m의 고산 도시이다. 그 덕에 지형상 자연적인 요새를 형성하고 우루밤바 강이 흐르는 비옥한 농경지를 확보할 수 있어 잉카 제국의 수도로 맞춤이었던 곳이다. 동시에 많은 여행자들이 고산병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곳이기도 하다. 잉카 제국의 옛 수도이자 스페인군이 가장 먼저 정복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건설했던 곳, 그리고 남아메리카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손꼽히는 마추픽추가 있는 도시인 쿠스코에서 희비가 엇갈렸던 옛 제국들의 자취를 느껴 보자.

세계에서 가장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문명의 하나인 잉카 문명의 중심지 쿠스코! 고도 3740미터 안데스 산맥의 고원에 있는 쿠스코에서 제일 먼저 잉카 문명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쿠스코의 중심지 아르마 광장입니다. 이곳에서는 스페인 식민 시대의 관청들과 성당들이 잉카의 주춧돌 위에서 그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쿠스코 공항

쿠스코 시내모습

쿠스코 시내모습

쿠스코 시내모습 엄마와 딸


여늬 시장과 마찬가지로 옷가게, 식품가게 등 생활용품들이 즐비하게 보인다.
상가옆 한쪽 귀퉁이에서 펴 놓은 노점 모습들에서 가난하나 억척스러움을 볼수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나 시장보러 나온 사람들이나 모두들 인디오 전통 의상들이다



잉카 제국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도시 쿠스코(Cusco), 케츄아어로 배꼽(또는 중앙)을 의미하는 꾸스코는 3,400m의 안데스 분지에 자리잡고 있는 인구 26만 명의 도시로 잉카문명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는 남미 여행의 백미로 꼽히는 세계적인 관광도시이다.

전설에 의하면 태양신이 자신의 아들과 딸을 티티카카 호수에 내려보내며 황금 지팡이가 꽂히는 곳에 정착하라고 하는데 그들이 쿠스코에 지팡이를 박고 도시를 건설했다고 한다


1533년 피사로를 비롯한 에스파냐인들에게 정복되었으나, 번영의 절정기를 맞이하였던 당시의 쿠스코는 정연한 시가지, 아름다운 건물, 거대한 신전 등으로 정복자를 놀라게 하였다.

잉카인들은 하늘은 독수리, 땅은 퓨마, 땅속은 뱀이 지배한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정신세계를 반영하듯 꾸스꼬는 도시 전체가 퓨마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 머리부분에는 삭사이와만 유적지가 자리하고 있다.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만큼 과거의 흔적을 더듬어 보면 한때 1백만명이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주민의 대부분은 잉카의 자손인 인디오이다.



쿠스코의 건물들은 스페인풍의 건물등이 주류를 이루는데 잉카를 정복할 당시 스페인 사람들은 잉카의 건물들은 무너뜨리고 그 기초석 위에다가 스페인식의 건물을 지어놓았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건물의 밑부분은 잉카시대의 것들이다.

잉카시대의 건물들은 일반사람들도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데 돌을 쌓은 모양을 살펴보면 잉카의 벽돌들은 아주 정교하게 다듬어지고틈이 거의 없이 쌓아져 있다한다.
하지만 그 이후에 만들어진 벽들은 엉성하게 쌓여있거나 시멘트로 메워져 있어서 아주 조잡하게 보인다.

태양의 신전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는 해발 약 3,400m에 있는 고원 도시다. 쿠스코 거리에는 아직도 잉카 제국의 궁전·신전 등의 석조건조물의 일부가 여기저기 남아 있다. 쿠스코의 알마스 광장에는 황제의 궁전과 태양의 처녀 궁전이 서 있었는데, 지금도 두 신전의 돌벽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태양의 처녀란 나라 안에서 뽑은 미녀들로 잉카의 주신인 태양과 잉카 황제를 위하여 옥수수 술을 빚거나 호화로운 직물을 짰다. 그리고 태양 축제 때에는 잉카 황제 곁에서 제전의 조수 노릇도 했다. 또한 태양의 신전이 있었는데, 이 신전을 코리칸차(황금의 울타리라는 뜻)라 한다. 신전의 안쪽 벽은 두꺼운 금판으로 덮여 있었고, 분수와 정원도 금으로 만들어 졌으며, 그리고 태양의 신상도 금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태양의 신전의 금은 정복자인 에스파냐 인에게 모두 빼앗겼다.


태양의 신전 안에는 역시 견고한 벽으로 둘러싸인 여러 방들과 장식대가 있으며 안뜰에는 축제 때 술로 가득 채워졌다는 우물이 남아 있다. 이와 공존하는 산토 도밍고 교회는 동시대에 지어진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웅장한 바로크 양식에 내부는 아름다운 제단으로 꾸며져 있다. 한편 태양의 신전 터가 남아 있는 앞 광장에는 코리칸차 박물관(Museo de Sitio del Qoricancha)이 있는데 이곳에서 잉카 제국의 유물들과 외과 수술이 행해진 해골들을 볼 수 있다

태양의신전

태양의신전  도자기

태양의신전  방이 창문을 통해서 옆방까지

태양의 신전 안에는 역시 견고한 벽으로 둘러싸인 여러 방들과 장식대가 있으며

태양의신전

태양의신전

필자뒤가 태양의신전 우물

태양의신전 2층에는 조각품들과 미술품이

태양의신전 금으로 만든 당시문자

태양의신전 안내도

태양의 신전 안에는 역시 견고한 벽으로 둘러싸인 여러 방들과 장식대가 있으며

태양의신전 천체를 그림으로

태양의신전 2층에서 바라본 쿠스코 시내


태양의신전 2층 에서 인정샷을

태양의신전  실과 갈대로 만든 낚시 도구

"잉카"는 케추아어로 "태양의 아들"이란 뜻이다.

아득히 먼 옛날 유럽사람들이 그 존재를 알기 오래 전부터 아메리카 대륙은 아메리칸 원주민이 살던 땅이었다.

그들은 독자적인 문명 사회를 구축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생명을 존중하면서 살아왔다.
우리가 알고있는 「잉카문명」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잉카제국 이전에도 많은 문명들이 존재했으나 그들 문명과 잉카제국은
문자가 없었던 관계로 그들의 생활양식 따위에 관한 것들은 단정할 수는 없고,
단지 그들의 유물과 "잉카제국"을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의 기록과 잔해만 남은
"마추픽추"의 유적에서 그들의 화려한 문명을 짐작할 뿐이다.
 


태양의신전  2층 당시 사용되었던 창

태양의신전 당시사용된 항아리

태양의신전  당시 부족민들


태양의신전  2층 유물전시관

태양의신전  2층 유물전시관  물고기가 사람얼굴을 하고있다

도밍고 성당

알카파 새끼

태양의신전  앞 유물터

태양의신전앞 공원

쿠스코 길거리 풍경

아르마스 광장 정면 중앙에 위치한 대성당(Cathedral)은 잉카 제국의 '바라코챠'신전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이 성당 지붕에는 40km 떨어진 곳에서도 소리가 들리는 1659년에 제작된 남미에서 가장

큰 종이 있다.

대성당안에는 지진의 신으로 숭배하고 있는 갈색 살색의 예수상이 모셔져있다.

라꼼파니아 데 헤수스 교회잉카 제국의 11대 황제 '와이나키팟쿠' 궁전 터에

세워진것이다.

지금 교회는 1650년대 대지진후에 재건, 쿠스코의 화가 마르코스 사파타가 그린

훌륭한 벽화와 멋진 제단이 유명하다

쿠스코의 중심지 아르마 광장입니다.  이곳에서 2층에서 점심 식사를하고

 

잉카가 대제국으로 존재했던 기간은 1세기 남짓한데 1430년대까지는 "쿠스코"계곡을 통치하던
지방왕국에 불과했지만 그 이후 정복을 거듭하다 안데스 지역에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1532년말 황금을 찾아 스페인에서 온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에 의해 이 "잉카제국"의
마지막 왕인 "아타왈빠" 왕은 화형선고를 받지만 화형대신 목이 잘린다는 조건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처형당함으로써 이 「잉카제국」은 종말을 맡게 된다.

아르마 광장에서본 산비탈 민가들

쿠스코 관광 현지가이드

유네스코 문화제 등록인정서

도밍고 성당 전경

12각의 돌이 박힌 잉카의 돌벽을 토대로 해서 세워진 종교 예술 박물관이나 잉카 제국의 황금 궁전 터에 세워진 산타도밍고 성당 말고도 많은 근대식 건물들이 잉카 유적의 흔적 위에 서 있답니다. 특히 산타도밍고 성당이 세워진 곳은 잉카 제국의 전성기 때 코리칸차 궁전의 터였어요. 당시 번영하던 잉카 제국의 상징이었던 이 궁전은 온통 금으로 덮여 있었다고 이렇게 금이 많다니!”

스페인 사람들은 그 금들을 모두 녹여서 스페인으로 가져갔습니다. 어찌나 금이 많았는지 유럽 경제가 혼란에 빠질 정도였지요. 산타도밍고 성당은 지진으로 그 모습이 사라졌지만 돌로 만든 잉카 제국의 건물 토대는 그대로 남아 있어 잉카 건축의 견고함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잉카는 안데스 산맥 원주민인 케추아족의 언어로 ‘태양의 아들’이란 뜻이에요. 그래서 잉카 인들은 그들의 창조주인 비라코차의 아들인 인티를 태양신으로 모셨어요. 태양신 인티는 지금 사는 세상, 즉 현세를 관장하는 신이에요. 안데스 산맥의 대지를 따뜻하게 품어 곡식을 맺게 해 주는 신이기에 잉카 농민들의 조상신이기도 하지요.

쿠스코의 중심지 아르마 광장입니다.

태양신을 숭배했던 잉카 인들은 마야나 아스텍 인들처럼 매일 지는 해를 에너지를 충전시켜 다시 떠오르도록 하기 위해서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을 바치는 의식을 치렀어요. 그런 의식을 통해 태양이 매일 다시 떠오르는 것이라고 믿었지요.

산도밍고 성당

신과 종교를 명분으로 내세워 파괴와 약탈을 서슴지 않았던 스페인 침략자들의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이 바로 태양의 신전과 산토 도밍고 교회라고 할 수 있다. 피사로와 스페인 군대가 처음 쿠스코에 왔을 때 태양이 반사되어 빛나는 황금의 신전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곧 신전의 안팎을 장식하고 있던 황금을 모두 약탈하고 신전을 부순 자리에 세운 것이 바로 산토 도밍고 교회이다. 너무 견고히 만들어져 부수는 것조차 힘들었다는 태양의 신전은 산토 도밍고 교회 앞에 남아 있는 거대한 신전의 터와 일부 돌담만이 남아 옛 모습을 추측하게 한다. 산토 도밍고 교회 바깥과 내부에 일부 남아 있는 돌담은 스페인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표면까지 정교히 다듬어져 물샐 틈 없이 쌓아 올려져 있으며, 1950년 지진이 일어났을 때 산토 도밍고 교회는 무너졌지만 돌담은 견실했다는 이야기는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이다.


태양의 신전 안에는 역시 견고한 벽으로 둘러싸인 여러 방들과 장식대가 있으며 안뜰에는 축제 때 술로 가득 채워졌다는 우물이 남아 있다. 이와 공존하는 산토 도밍고 교회는 동시대에 지어진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웅장한 바로크 양식에 내부는 아름다운 제단으로 꾸며져 있다. 한편 태양의 신전 터가 남아 있는 앞 광장에는 코리칸차 박물관(Museo de Sitio del Qoricancha)이 있는데 이곳에서 잉카 제국의 유물들과 외과 수술이 행해진 해골들을 볼 수 있다.

아르마스광장

잉카 인들은 마야 인들이 상형문자를 썼던 것과는 달리 문자 대신 아마우타라를 사용했어요. 이것은 사람들이 제사를 쓸 때 사용하는 기원문이나 후세에게 전해야 하는 전통 같은 것을 입에서 입으로 외워서 전해 기억하는 방법이에요.

여기 2층에서 점심식사를 식당

그리고 다른 보조 수단으로 퀴프라는 것을 썼지요. 잉카 문명의 산물인 퀴프는 한 가닥 끈에 여러 가닥의 끈을 직각으로 매단 것을 말해요. 잉카 인들은 그 퀴프의 색깔과 퀴프에 지어진 매듭의 숫자나 모양, 매듭이 지어진 위치 등으로 가구 수나 세금액 등을 계산했어요. 이를테면 ‘순수, 평화, 돈’은 하얀색, ‘황금, 태양, 영원’은 노란색, ‘피, 불꽃, 전쟁’은 빨간색으로 표시하는 식이었어요. 또 굵은 끈에 여러 가닥의 끈을 달아매어 다양한 숫자를 나타냈어요. 퀴프는 그래서 잉카 인들의 필수품이었어요. 잉카 제국이 멸망하고 난 뒤 유럽인들이 퀴프가 무엇인지 해독해 냈을 때, 그들의 인구나 가축, 가구 수를 계산한 것이 아주 정확해서 놀랐다고도 하지요.


아르마 광장에서본 산위의 빈민촌

런데 무엇보다 잉카 인들이 현대인들을 궁금증에 빠뜨리게 한 것은 바로 건물을 만들기 위해 돌을 깎고 다듬는 석공 기술일 거예요. 잉카 인들은 금속으로 만든 도구를 사용하지도 않고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을 잘라 정확하게 쌓았어요


삭사이만 입장권




삭사이만 언덕위에 세워놓은 예수상

삭사이만 에서 바라본 쿠스코 시내모습

태양의 축제가 열리는 삭사이만-

페루 쿠스코 지역의 돌로만든 정교한 방어요새 삭사이와만.1번째


잉카 인의 세계관은 우주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천상과 지상, 그리고 지하다. 하늘은 독수리가, 지상은 퓨마가, 지하는 뱀이 제각각 상징물이다.

쿠스코가 지구의 중심이기에 이 도시를 퓨마로, 그리고 '삭사이와만'은 퓨마의 머리에 해당된다고 믿었다.

이 같은 세계관에 따라 유적 뒤쪽의 커다란 자연석 아래에는 쿠스코 중심인 대성당에 이르는 미로가 연결됐다고 여겼다.

석 벽 앞에는 넓은 잔디밭을 조성했고, 이곳에서는 매년 6월 24일 '태양의 축제(Inti Raimi)'가 열려 잉카시대 의식을 재현한다.

이 축제는 브라질 '리오 카니발'과 볼리비아의 '오르로'와 함께 남미대륙 3대 축제행사의 하나로 꼽힌다 

해발 3600m 고지라서 고산증이 오는바람에 힘들어서 들어누웠다.

"독수리여 날개를 펄럭이라"는 뜻을 지닌 삭사이와만, 푸마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삭사이와만은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를 방어하는 성으로 만든 요새이다.

삭사이와만의 건축은 제 9대 황제 파차쿠티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거석을 3층으로 쌓아올려서 만든 돌벽은 22회의 구불구불함(지그재그)을 그리면서 360m에 걸쳐서 이어진다 .

석조 기술은 잉카의 석조처럼 빈틈없으며 돌의 표면은 둥그스름하게 다듬었고 돌과 돌 사이는 완전히 밀착되어 있다.

내부에는 석탑, 황제의 거소, 일반가옥, 병사, 무기나 식량의 창고, 저수조 등이 있고 곳곳을 연결시키는 지하도가 있다.

또 정상에는 거대한 해시계를 설치했다. 당시 주요 농작물이던 감자, 옥수수의 재배나 수확시기를 가늠하기 위한 시계라는 것이다.

사용한돌은 근교의 것뿐만 아니라 멀리 올란타이탐보에서도 운반 하루에 3만명을 동원하여

약 80년이 걸려서 제10대 황제 잉카유팡키가 축조하였다 한다.


쿠스코는 해발 3,400m의 분지라 그런지 걸어다니는데도 숨이 찬다.
삭사이와만에 오르는 길은 더욱 숨이 차는것 같아 자주 쉬며 올라간다.
푸노, 티티카카, 그리고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고도 3,800~4,200m) 까지는
점차 고도가 높아지니 몸도 서서히 고도에 적응될것 같다.


사진 몇장 찍고 들어눕고 고산증은 힘들어 결국 1~3번까지는 유적지를 둘러보았으나

더높은 곳에 있는 푸카푸카라 요새는 완정히 포기하고 가보지도 못했다.

모두들 고산증에다가 힘들어 휴식을

알카파와 페루여인들

알파카

알카파와 페우여인들 사진을 같이 찍고 1달러씩

잉카제국 제레장가는 곳 입장권확인


잉카제국의 제레장이였던 켄코유적 2번째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제레대

켄코유적에서본 쿠스코 시내

성스러운샘이 흐르는 잉카제국의 목욕탕이였던 탐보마차이 3번째


알카파와 여인

쿠스코 북쪽을 지키기 위한 요새였던 푸카푸카라 4번째  입구












중남미 여행 11번째 페루 우르밤바로 갑니다


 

 









































2019.3.19~2019.4.9 22일간의 중남미 여행기 9편

페루 이카, 나스까 

가이드 박경숙사장(꼬꼬투어)  T 51-444-4011-2 HP 51-976-170-652

페루 이카 나스까    2019.3.26~3.27 여행8일~9일째


오전에 파라카스에서 물개섬투어를하고 오후에는 이카로이동하여  사막투어를한다.


페루나라자체가 사막의 나라여서 그런지 고속도로를 타고가면서 보면 양쪽이 사막모래와

흙이 쌓여 있는데 물이 없어 허허벌판에 집들이 듬성 듬성있고 간혹가다가 설산에서 내려오는

강줄기 물이 있는곳에는 큰마을과 강주위에 농사를 짓는 모습을 볼수 있다.

이카에로 이동하니 와까치나 사막의 오아시스가 너무나 볼만하다.

신기하게 사막에 둘러쌓여 중앙에 큰 호수가 있고 주위에는 마을과 숲이 형성되어 있어

모래산위에서 보면 한폭의 그림같다.

자 지금부터 샌드카 사막투어를 시작해보자.


샌드카 사막투어후 나스까로 이동하여 호텔 숙소에서 자고 다음날 나스까 경비행기를 타러 간다


페루 이카

건조한 기후 조건으로 인해 와인과 샌드보딩으로 유명한 이카는 시내를 제외하고는 주변이 온통 황량한 모래 먼지가 날리는 사막 도시이다. 지리적으로는 리마에서 3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나스카나 쿠스코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중간에 하루 정도 들러 레포츠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이카와 관련된 전설에는 소위 ‘이카의 돌’이라 불리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이카는 16세기경부터 존재한 오래된 도시로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사막 도시였는데 1960년대에 내린 엄청난 폭우로 지반이 씻겨져 내려간 자리에 고대 신비로운 그림이 새겨진 돌무더기들이 발견된 것이다. 이 돌들에는 동시대에 존재할 수 없었던 공룡들의 모습과 사람이 공룡을 타고 있는 모습, 심장 수술 등 과학적인 지식이 존재해야 가능한 각종 수술 장면들, 나스카 문양과 비슷한 형상들의 그림이 새겨져 있어 아직까지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실제로 이카의 고고학 박물관(Museo Regional)에는 뇌수술이 행해진 두개골 등이 보존되어 있어 고대 이카의 옛 문명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또한 샌드보딩으로 유명한 이카의 와카치나에 가면 모래 언덕을 스릴 있게 내달리는 버기 투어를 즐기며 진정한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날 수 있다. 묘한 매력이 존재하는 도시인 이카에서 오아시스 같은 휴식을 취해 보자.


이카 박물관

이카를 대표하는 고대 박물관으로 잘 보존된 미라와 잉카 시대의 두개골 수천 개가 전시되어 있어 상당한 수준의 수집품을 자랑한다. 이는 나스카와 파라카스 등지에서 발견된 잉카 시대의 유물들을 모아 놓은 것들이다. 여러 미라 중에 여성으로 추정되는 어떤 미라는 머리카락과 머리띠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것들도 있어 살짝 오싹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또한 수많은 두개골 역시 각양각색의 모양을 하고 있는 가운데 뇌수술이 행해진 것으로 추정되는 구멍 뚫린 것에서부터 선천적인 기형인지 인위적인 변형인지 인간의 것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변형된 것들까지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다.

그 밖에도 옛날 도기들과 직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하므로 이카에 왔다면 한번쯤 방문할 만하다.

위치 : 아야바카 거리(Av.Ayabaca)에서 호세 엘리아스 거리(Av. Jose Elias)를 따라 서쪽 방향으로 조금 들어가면 된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서쪽으로 도보 15분  

관광안내소

버기카가 뭔가 했더니 철근을 이리저리 용접하여 개조한 쥐 햄스터 같이 생긴 차였다.

이 차가 이래뵈도 사막에서는 어찌나 잘 달리는지 엄청 놀랐다

모래의 뜨거운 열기와 바람이불면 눈과 입으로 들어가는 모래 폭풍을 막아라

사막한가운데 오아시스의 와 버기카

관광객을 기다리는 버기카

페루 남서부 도시로 안데스 산맥 서쪽 경사면과 이카강을 형성한 좁은 계곡사이에 위치한다.건조한 기후 인해 와인과 샌드보딩으로 유명한 이카는 시내를 제외하고는 주변이 온통 황량한 모래 먼지가 날리는 사막 도시이다.

지리적으로는 리마에서 300km 정도 떨어져있으며,쿠스코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하루 정도 들러 레포츠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오아시스 주변의 마을을 둘러보며

건조한 기후 조건으로 인해 와인과 샌드보딩으로 유명한 이카는 시내를 제외하고는 주변이 온통 황량한 모래 먼지가 날리는 사막 도시이다. 지리적으로는 리마에서 3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나스카나 쿠스코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중간에 하루 정도 들러 레포츠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이카와 관련된 전설에는 소위 ‘이카의 돌’이라 불리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기념품가계도 있으나 조잡하여 살것이

이카는 16세기경부터 존재한 오래된 도시로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사막 도시였는데 1960년대에 내린 엄청난 폭우로 지반이 씻겨져 내려간 자리에 고대 신비로운 그림이 새겨진 돌무더기들이 발견된 것이다. 이 돌들에는 동시대에 존재할 수 없었던 공룡들의 모습과 사람이 공룡을 타고 있는 모습, 심장 수술 등 과학적인 지식이 존재해야 가능한 각종 수술 장면들, 나스카 문양과 비슷한 형상들의 그림이 새겨져 있어 아직까지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실제로 이카의 고고학 박물관(Museo Regional)에는 뇌수술이 행해진 두개골 등이 보존되어 있어 고대 이카의 옛 문명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사막의 오아시스 주변 민박집의 수영장

버기카를 타기 위해 모래산을 오르고

사막의 오아시스

버기카는 9~12명 정도 탈 수 있는 것 같은데

부우우웅~ 소리와 함께 버기카를 타고 정신없이 간 사막

마스크는 필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래에 정신이 없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페루 이카의 거대한 모래사막, 여행자를 태운 샌드지프는 속도제한 없이 사막을 질주한다.

난생처음 타보는 샌드지프, 사막의 모래 둔덕을 비스듬히 내리 달리는 쾌속의 전율을 선사한다. 60도의 모래 경사를 직속 하강하는 샌드보드의 무한 쾌감은 무아지경이다. 샌드지프의 쾌속질주와 더불어 급경사의 모래언덕에서 즐기는 샌드보드의 짜릿함은 겨울 스키의 그것에 비해 두 배는 족히 더하다. 이 쾌속의 즐거움이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려준다.

후아카치나 오아시스에 당도해야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있겠지만, 이카는 샌드보드 이외에 샌드지프도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도무지 잉카 제국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모래사막과 모래언덕(sand dunes)이 사방 천지를 뒤덮고 있다. 오아시스가 눈길을 끈다, 하지만 샌드지프가 선사하는 최고의 모험과 짜릿한 전율에 비길 바 아니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던 그 거대한 무인지경의 모래사막, 신비한 장관이 파도처럼 펼쳐진다.

모래언덕에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다

한대의 오프로드(sand buggy) 차량에 여섯 명이 탑승한다. 각자 샌드보드를 챙겨 들고 오아시스를 떠나 모래사막의 중심으로 향한다. 모래언덕에 힘겹게 올라서자, 사방 천지가 온통 광활한 사막이다. 갑자기 공포감이 몰려든다. 무인지경의 뜨거운 사막. 30 도의 따가운 태양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방어책은 오직 고글뿐이다. 더위를 막기보다 자외선을 차단해야 한다.

얼굴이 새카맣게 타버린 운전사는 겁도 없다. 그 장막처럼 보이던 높고 험한 모래사막의 정상을 향해 끝없는 무한 질주를 시작한다. 긴장된 순간이다. 첫 출발, 경사 60도의 모래언덕 위를 미친 듯이 질주한다. 상하 좌우,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천지를 가르듯 쾌속으로 질주한다. 아예 모랫바닥에 팽개쳐진 듯 누워 일어서지 못한다. 짜릿함의 카타르시스와 동시에 오장 육부의 고통도 느껴야 한다. 난생처음 시도해보는 모래펄의 질주, 무인지경의 뜨거운 사막 위에서 느껴본 끝없는 광기다.


다시 언덕 위 가장 높은 정상에 다다르더니 곧 출발 신호를 보낸다.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기절해 병원에 실려간 사람도 여럿 있었다고 한다. 책임은 스스로의 몫이다. ‘샌드버기’라 불리는 4륜 차는 한국에서 즐기는 웬만한 놀이기구 이상이다. 벨트를 안 하면 정말 몸이 공중으로 날아갈 정도로 그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코너링과 스피드의 짜릿함을 즐기는 게임이다.

갈증을 달래고 드디어 모래 위에서의 샌드보드가 시작된다. 과연 이 모래 위로 이 보드가 미끄러질 것인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샌드보드는 쾌속질주 한다. 모래언덕을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려온 사람들은 그 짜릿함에 놀라고 취해서 샌드버기를 타고 다시 모래 고지를 향해 오르기를 반복한다. 바람을 가르고 사막을 질주하며, 모래언덕의 경사를 내리질러 쾌감을 맛보는 이카의 샌드보드, 인기 만점이다.

잉카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 문명의 땅 페루, 한적한 사막 위의 작은 오아시스 너머로 이처럼 환상적인 체험을 할 수 있는 익스트림 레포츠가 존재한다니 경이로울 따름이다. 페루와 인근 칠레북부 사람들, 볼리비아는 물론, 저 멀리 유럽과 미국에서도 찾아온다는 사막 위의 질주, 모래언덕의 샌드보드는 잉카의 땅에서 체험하는 상상치 못한 모험이며, 거친 사막의 낭만이 함께하는 스릴만점 카타르시스인 것이다.


지구 반대편의 나라 페루. 태평양, 안데스 산맥, 마야 문명, 그리고 아마존 정글. 이 모든 아이콘들을 잠재우고 또 하나의 자연, 사막이 우리를 기다린다. 페루의 오아시스 도시 이카(이까, ica), 태평양과 마주한 거대한 사막은 질주본능을 일깨운다. 샌드보드(Sand Board)를 타고 무한 질주를 만끽한다

기사가 모래언덕을 오르내리며 질주하는 통에 스릴도  느꼈지만 혼을 다 빼놓을 정도였다. 

당초에 이곳의  일몰을 보려고 버기카를 타고 모래언덕에 도달했는데

샌드보드를 즐기는 일행들, 하얀 눈 뒤덮인 스키장이 아닌, 지구 반대편 남미 페루의 거대한 모래언덕에서 스피드를 즐긴다.


또한 샌드보딩으로 유명한 이카의 와카치나에 가면 모래 언덕을 스릴 있게 내달리는 버기 투어를 즐기며 진정한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날 수 있다. 묘한 매력이 존재하는 도시인 이카에서 오아시스 같은 휴식을 취해 보자.


관광객을 기다리는 버기카

운전도 해보고


페루는 비가오지 않아 산전체가 사막으로

나스카가는길에 해골산

나스카 가는 길목 강주위에는 마을과 농사를 짓는 모습이

페루의 전통식 저녁식사 와 와인


MAJORO HOTEL  오늘 묵었던 호텔에서 야간에 혼자나와 수영을 하고

MAJORO HOTEL  야경

MAJORO HOTEL

MAJORO HOTEL  야경



MAJORO HOTEL

MAJORO HOTEL 안에 매점

MAJORO HOTEL 호텔의 아침 산책



MAJORO HOTEL 아침산책 공작새도보이고

페루 나스카

나스카는 독특하게도 모래가 아닌 돌로 이루어진 사막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침식 작용으로 형성된 계곡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일년 내내 비가 거의 오지 않는 데다 바람마저 불지 않는 기후와 맞물려 나스카 라인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보존될 수 있었다.

나스카 라인에서 관찰되는 문양은 파라카스와 나스카, 우아리 등 적어도 세 개 이상의 남아메리카 고대 문명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기원전부터 1세기 전반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새겨진 것이다.


공중에서 보지 않는 이상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덕에 20세기에 나스카를 가로지르는 판아메리칸 고속도로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제대로 발견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나스카 라인은 누가, 어떻게, 왜 그렸는지 명확히 설명되지 않은 미스터리에 쌓인 유적이다. 나스카 라인은 천체 관측이나 고대인들이 사용했던 달력이라는 설부터 종교 의식과 관련되었다는 설, 심지어 외계인들과 교류한 흔적이라는 설까지 다양하게 제기되는 가운데 아직까지도 왜, 그리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베일에 쌓여 있다.


나스카 비행장으로 가는길에 양쪽으로 선인장이 가득하고



나스카 비행장에 도착 

가이드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서 여권을 꺼내었다. 그리고 경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경비행기에

타고 갈 짐(카메라, 핸드폰은 되고, 배낭은 안된다)을 들고 몸무게를 모두 재었다. 몸무게에 따라

비행기 좌석이 지정된다


경비행기 요금이 30불

비행기표

경비행기를 타고 도는순서

기념품가계


잠시 기념품가계에서 티샤스도 한장사고


티샤스 우주인 그림

티샤스 공작새 그림

이 지역은 연 강수량이 10mm도 되지 않으며, 바람도 거의 없는 지역으로 지표면은 산화되어 진녹색과 흑갈색의 돌자갈로 덮여 있다. 이 돌들을 약 30cm 걷어내면 밝은 색의 모래바닥이 나타나는데, 나스카 지상화는 일정한 폭으로 돌을 걷어내어 선을 표시하는 방식으로 그려졌다. 바람과 비가 드물어 극도로 건조한 기후 때문에 이렇게 만들어진 선이 침식되지 않아 만들어진 후 2,000년이 넘는 시간에도 원형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념품가계 돌에다가 그림을

페루 리마에서 남동쪽으로 320km 거리에 있는 나스카시 북쪽 고원 분지의 자갈사막 평원에 그려져 있는 거대한 그림. 직선 800개 이상, 삼각형·나선형과 같은 기하학적 문양이 300개 이상, 새·원숭이·거미·꽃 등의 자연물 형상이 70개 이상 그려져 있다. 각각의 이 지상화는 길이가 때로 수백m나 되어 지면에서는 모양을 판독하기 힘들지만 공중에서는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나스카와 후마나 평원의 선과 지상화(Líneas y geoglifos de Nazca y de Pampas de Jumana)라는 명칭으로 1994년 등재되었다.

공중에 올라갈 수 없었던 시절에는 나스카 지상화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다. 페루의 고고학자인 토리비오 메히야 제세페(Toribio Mejia Xesspe)가 1926년 이 지상화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를 시작했지만 전체적인 모양을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연구가 진척되지는 않았다. 1939년에 이르러서야 이 지역 상공을 날아가던 비행기 조종사가 처음으로 전체적인 그림 모양을 발견했다.

경비행기를 타고


경비행기 같이탄 일행들과 인정샷을


경비행기 안에서

나스카 라인에 대해 논하려면 먼저 나스카의 기후와 지형 특성을 알아야 한다. 나스카는 사막으로 이루어진 지형에 연 강수량이 20mm도 채 되지 않고 바람마저 불지 않는 건조 기후이다. 더욱이 나스카의 사막은 일반적인 모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자갈과 돌로 이루어진 돌사막이다. 이러한 환경이 수천 년 전에 그려진 나스카 라인을 현재까지 남아 있게 한 주요한 원인이 된 것이다.

공중에서 보지 않는 이상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덕에 20세기에 나스카를 가로지르는 판아메리칸 고속도로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제대로 발견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나스카 라인은 누가, 어떻게, 왜 그렸는지 명확히 설명되지 않은 미스터리에 쌓인 유적이다

나무

원숭이


원숭이

도마뱀

거미


거미

활주로

고래

플라밍고

벌새

콘돌

우주인

콘돌

이곳은 과거에 물이 흘렀던 자국으로 보인다. 얼마나 비가 오지 않았으면 이런 자국도 선명하게 남아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상에서는 구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큰 나스카 라인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평생 나스카 라인 연구에 매달려 온 마리아 레이체(Maria Reiche) 박사는 말뚝에 줄을 매어 고정시키는 방법으로 직선을 그리고 콤파스의 원리를 이용해 원과 곡선을 그렸다고 확신했으며 실제 말뚝을 박았던 흔적도 발견이 되었다.

제기되는 첫 번째 가설은 천체 관측과 고대인들이 사용한 달력이라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농경을 위한 계절의 변화를 알기 위해 천체를 관측하고 그 움직임을 지면에 새겼다고 보는 주장이 존재한다. 하지만 천문학자들이 고대의 해와 달, 별들의 위치를 추정한 결과 나스카 라인이 당시의 천체 위치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도출했다. 또다른 학자는 나스카가 고도(古都)인 만큼 종교 의식이나 성지로의 인도를 목적으로 한 그림을 그린 것이라고도 주장한다. 자연과 산을 숭배하는 고대인들이 성스러운 마음과 풍년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만든 그림이라는 것이다.

가장 흥미로운 가설은 외계인과의 교류를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대 외계인들이 두 개의 활주로를 건설하고 떠난 뒤 그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원하고 자신들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공중에서 알아볼 수 있도록 거대한 도식을 그린 것이라는 주장이다. 나스카 라인 부근에서 발견된 토기와 직물에 그려진 비행체처럼 보이는 문양과 하늘을 나는 사람이 묘사된 그림을 통해 이러한 주장은 더욱 힘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명확히 납득할 수 있는 주장과 근거는 밝혀지지 않고 있어 미스터리는 더욱 의문으로 남는다

 나스카 라인은 공중에서 내려다봐야만 형상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각 그림 하나하나가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다. 날개 하나의 너비가 100m를 넘는 새, 돌돌 말린 꼬리가 인상적인 원숭이, 방사형의 가지를 활짝 편 나무, 활주로와도 같이 길게 뻗은 꼬리를 가진 도마뱀, 그 밖에도 거미, 개, 외계인 등을 비롯해 기하학적인 도형까지 현재 발견된 그림들은 200여 개가 넘는다.

1939년 미국의 과학자 '폴 코소크'는 고대의 관개시설을 조사하던중 거대한 거인이 땅위에 그려 놓은 듯한 나스카 라인을발견한다. 수백킬로미터에 이르는 기하학적인 선에서 부터 나무, 원숭이, 거미, 벌새, 외계인들의 형태가 뚜렷한 그림까지300km에 걸쳐 그려진 나스카 라인은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서 봐야 온전하게 관찰할 수 있다. 1년내내 건조하고 비가 거의내리지 않는 사막 기후 덕분에 오랜 세월동안 그 형태가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비행을마치고 일행들과 함께

나스카 라인은 전망대에서 보는 것과 경비행기인 세스나기를 이용해 보는 방법으로 나뉜다. 날씨에 구애 받지 않고 조금이나마 선명하게 보려면 오전 10시 이전이나 오후 3시 이후에 보는 것이 좋다.

우리가 탔던비행기

경비행기 수료증



리마로 가기위해 왔던길을 뒤돌아 간다

강을 따라 형성된 마을과 울창한숲들

강이 없는곳에는 황랑하기 그지없다.

산위에 적십자 교통사고로 희생된 넑을 기리며

고속로 가는 길목에 모래언덕 아래 마을이

리마 시내 도착

리마시내 여자교통순경


다음날 쿠스코로 가기위해 비행기장에서

쿠스코 안내판 삼성 간판이

쿠스코로가는 비행기을 타기전에 인정샷을



















10편 페루 쿠스코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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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3.19~2019.4.9 22일간의 중남미 여행기 8편

페루 리마, 파라카스 갈라파고스 바이에스타섬 

가이드 박경숙사장(꼬꼬투어)  T 51-444-4011-2 HP 51-976-170-652

페루 리마,파라카스    2019.3.26 여행8일째

쿠바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밤 21:20분이되어서 페루리마에 도착하여 바로호텔로 직행

다음날 리마시내를 거쳐 파라카스 갈라파고스섬 자연과 더불어사는 물개섬에 사는 홈볼트펭긴을본다
모터보트에 약30명정도 승선 다름배보다는 좀더 크다  작은 갈라파고스라불리는 물개섬투어를 한다


페루는 사막지대로 총인구 3,150만명 리마인구는 천만명  지진이 많은 나라이기도하다

페루는 후지모리대통령이 10년장기집권하였고 리마시내는 항상 안개지역으로 하늘이 뿌였다.

해뜨는날은 1년53일정도 사막지대에 생긴도시로 1년 비가오지않아 도시전체가 항상먼지를 뒤집어 쓰고있고 바다가 인접하여 습기가 많다 1년 비의 량은 12mm 정도이다.

리마에는 한국sk 유전공장이 있다. 파라카스가는 길목에 보인다.


리마 성당

리마 성당

리마 성당

페루 리마시내

해안 사막 지대에 위치한 리마는 일 년 내내 비가 거의 내리지 않으면서도 안개가 끼어 있는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많은 독특한 기후의 특성이 나타나는 도시이다. 리마는 페루 전체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거주하는, 남아메리카 내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 중 하나로 많은 여행자들이 이곳에서 페루 여행의 첫 여정을 시작한다

페루 리마시내

스페인은 잉카 제국을 무너뜨린 후 대륙 침략의 기지로 삼기에 유리한 고지인 해안 지역에 위치한 리마를 주도로 삼아 19세기 초 남아메리카 각국이 독립할 때까지 중심지의 역할을 담당하게 했다. 그 결과, 이러한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아름다운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과 박물관이 도심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다양한 볼거리가 많은 리마를 다닐 때에는 크게 구시가지인 리마 센트로 지구와 신시가지인 미라플로레스 지구로 분류하여 일정을 짜는 것이 효율적이다.

대부분의 대도시가 그러하듯 리마 도심에는 고층 건물들과 번화한 광장이 화려한 수도임을 알리고 있지만, 변두리 사막에는 직접 말려 만든 아도베(adobe)라는 흙벽돌로 쌓아 올린 붉은 건물들이 지붕도 없이 빈민촌을 형성하고 있다. 도심과 주변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식민지 시대 문화와 현대 문화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리마에서 그들이 공존하는 삶의 방식을 몸소 느껴 보자.

마요르광장 중앙에 있는 분수대 그위 천사상

마요르광장 중앙에 있는 분수대 그위 천사상

마요르광장 페루 대통령궁

리마 대성당

대통령궁옆 카라비아 거리

리마에서 파라카스가는고속도로

파라카스 도착 해변가 점심시간이되어 점심식사후 갈라파소스로 보터보트타고이동

파라카스 선착장 해변가

파라카스 해변가 식당가는길 


쎄비체, 해물볶음밥, 생선튀김 등

  항구 선착장 앞에서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는 상가들은 대부분 음식점들이다. 수도 리마로 공급되는 대부분의 생선이 이곳 항구에서 공급되어서 인지, 점심 식단에 올라오는 생선들이 신선하고 맛있다.



파라카스 해변가

파라카스 해변가 선착장 보터보트를 타기위해 줄을서고

갈라파고스 섬으로 가기위해 우리가 탈 보터보트 

갈라파고스 섬으로 가기위해 드디어 배를타고 출발 

갈라파고스 섬으로 가는 선장 

갈라파고스 섬으로 가는 도중 잠시들린 섬 

갈라파고스 섬으로 가는 도중 잠시들린 섬 펠레칸이 날개짓으로 환영인사

갈라파고스 섬으로 가는 도중 잠시들린 섬 펠리칸

드디어 도착 갈라파고스 섬

해상국립공원인 작은 갈라파고스라 불리는 새들의 천국 바예스타스(Ballestas, )


 물개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모든 새들의 천국 갈매기때

멀리 섬이 보이면서부터 새똥 냄새가 진동하고



 주위에는 물고기가 많아 어부들이 여기서 한창 직업을

해상국립공원인 작은 갈라파고스라 불리는 새들의 천국 바예스타스(Ballestas, )

해상국립공원인 작은 갈라파고스라 불리는 새들의 천국 바예스타스(Ballestas, )

 물개들도 망중한을 즐기고

해상국립공원인 작은 갈라파고스라 불리는 새들의 천국 바예스타스(Ballestas, )



펠레칸들이 수없이 많다

해상국립공원인 작은 갈라파고스라 불리는 새들의 천국 바예스타스(Ballestas, )



옛날에 설치한 전망대겸 선착장

해상국립공원인 작은 갈라파고스라 불리는 새들의 천국 바예스타스(Ballestas, )

물개들의 천국 이기도 하다 주위에 물고기가 많아

멸종위기라는 작은 펭귄들이 서서 이방인을 환영한다. 일부일처제에 수컷의 수가 적다보니, 암컷의 구애(작은 돌을 앞에 떨어트려 표시)는 치열하다고 한다. 수많은 새들의 배설물로 인해 냄새가 역겨우면 손수건이나 마스크를 준비하라고 한다. 공원 관리원들이 가끔 분비물인 구아노(Guano)를 수거하여 비료나 연료로 사용한다고 한다. 물개들이 나타나면서, 거대한 몸짓(최대 3m, 300kg)을 자랑하는 수컷 한마리가 거느린 암컷(많게는 20~30마리를 거느리는 일부다처제)과 짝짓기를 한다

해상국립공원인 작은 갈라파고스라 불리는 새들의 천국 바예스타스(Ballestas, )


물개들도 따뜻한 햇볕에 몸을 말리며 망중한을 즐긴다. 섬 가운데에는 해상 국립공원 표시와 함께 건물이 있는데,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이기에 창고로 보인다. 풍화작용에 의한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는 해안절벽과 동굴에 부딪히는 파도가 조화를 이뤄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낸다. 긴 부리를 자랑하며 무리를 이룬 펠리칸을 마지막 보고는 30여분의 관광 마치고 귀항한다. 파도가 심하면 우의까지 입어야 하고, 카메라와 핸드폰은 바닷물로부터 조심해야 된다는데, 바람이 약해 다행이었다

해상국립공원인 작은 갈라파고스라 불리는 새들의 천국 바예스타스(Ballestas, )

이새들은 앞서가는 리더 따라 끝없이 따라간다 한편의 드라마 같은 장관이 펼쳐진다 보고 있노라니 끝이 안보인다


해상국립공원인 작은 갈라파고스라 불리는 새들의 천국 바예스타스(Ballestas, ) 섬을

돌아본 후 선장과 함께 인정샷을



해상국립공원인 파라카스 해변가에는 펠리칸들이 사람들이 주는 먹이를 얻기위해













다음9편 페루 이까로 갑니다 


                         





Chantays / Wayward Nile 

 

2019.3.19~2019.4.9 22일간의 중남미 여행기 7편

쿠바 하바나 가이드  현지인 마레

쿠바 하바나   2019.3.24 ~3.25


오늘은 아르마스광장을 거쳐 씨티투어 야간포격식장으로이동 포격식 관람후 다음날

수공예 시장을 관광한다.


시내로 가는도중 버스에서 촬영






아르마스 광장은 수많은 박물관과 도서관, 기념비, 콘서트 홀 등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즐비해 있으며 만들어 진지 4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하바나 시민들의 휴식처입니다. 중앙에는 19세기 쿠바를 독립으로 이끈 영웅 세르페데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아름다운 분수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벤치, 수많은 가스등이 있어 고풍스러운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대성당에서 도보로 약 10분정도 걸리며 하바나에서 가장 오래된 광장입니다.

유엔사무총장이 머리를 깍았다는 이용원

아르마스구광장

광장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사진을 찍고 돈을받는 무희들이 거리를 누비고

쿠바는 닭이 복을 준다나

거리의 악사들

아르마스광장에서 가던중 어느집에서

아르마스광장에서 가던중 약국을 들려서


쿠바인 서민들이 타는 자가용택시

시내 식당 헤밍웨이가 자주 찾아 마셨다는 와인빠 와 커피

시내 버스투어 시내버스투어중 점심을 먹고 호텔로가는 바람에 여유시간을 우리일행중 5명이 다시

시티투어를 타고 시내로 가서 아르마스광장등을 재차 관광하였다 

.아르마스 광장 중앙에는 1868년 쿠바를 독립으로 이끈  영웅 세스페데스의 동상이서 있다.

아르마스광장은 수많은 박물관과 도서관, 기념비, 콘서트 홀 등 역사적인 건물들로 둘러 쌓여 있으며 건설 된 지 400년이 넘은 하바나 시민들의 휴식처이다.

아르마스 광장 중앙에는 1868년 쿠바를 독립으로 이끈 영웅 세스페데스의 동상이서 있으며 작고 아름다운 분수가 있고 대리석으로 만든 벤치와 많은 가스등이 있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재차 시티투어를 타고 시내로향했다.


송혜교가 촬영을 했다는 암보스 문도스호텔 6성급호텔이다.

시티투어

공동묘지 세계3대공동묘지로 알려져 있다.

공동묘지 세계3대공동묘지로 알려져 있다

공동묘지 세계3대공동묘지로 알려져 있다


시티투어 도중 만난 혼자여행하는 한국인 자매님 책을 여러권읽고 혼자서 한달가량 남미여행을

자유여행하시는 분을만나니 반갑기도하고 가이드보다도 더잘알고 안내를 해준다.

여자혼자서 남미여행을 하는 자매님 자세한 설명에 감사를 전한다.

기념품가게는 언제나 사람들이 분빈다. 마땅하게 살것이 없다


거리 에술가들 2달러씩 받고 관광객들에게 사진을 같이 찍어준다.


조각품과 같이 사진을

대 성당은 교황 바오로 2세가 생전 남미선교여행 마지막으로 미사를 보았던 곳이며 콜롬부스의 유해가 안치 되었던곳 이기도 하다.


대 성당은 교황 바오로 2세가 생전 남미선교여행 마지막으로 미사를 보았던 곳이며 콜롬부스의 유해가 안치 되었던곳 이기도 하다.


성당안이 초라하다


유엔사무총장이 이발을한 이발소

시티투어중



카브리해 바닷가에서


저녁을 먹고 포격식장으로 이동 포격식장 가는길

거대 포를 쑤시고 밤9시에 달랑 1발를 쏜다  순식간에 이루어져 수많은 관광객이 못보는 사람이

허다하다.  좀 허무하다.

포격식하는 군인들과 함께 인정샷


옛날에 쓰던 대포알

호텔 수영장 이른새벽이라 해보지도 못하고

말레콘 해변
말레콘 해변은 센트 하바나 동쪽으로 북쪽을 따라 올드 아바나의 하바나 항구 입구에서 쿠바 아바나의 해안을 따라 8km 뻗어있는 넓은 도로와 방파제입니다.


20만톤의 유람선이 정박하고

거대 예수상을 만나보고

브라질 거대 예수상과 크기가 비슷하다





푼타 요새

푼타 요새
16 세기에 지어진 작은 요새로 모로 성처럼 아바나 만 입구를 방어하기 위해 설계되었고, 마을의 정착 이후 중요하고도 전략적인 항구의 입구통로가 되었다

푼타 요새

카브리해를 바라보며 푼타 요새

푼타 요새에서본 시내

푼타 요새

푼타 요새

푼타 요새  인정샷

미국의 60년대 차량들이 여기 다모였다. 이차로 영업을하며 살아가는 택시운전사

수공예시장을 가기로하였는데 영국황태자 부부가 이날 수공예시장을 찾아서 모든 교통을 통제하는 바람에 가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파는 수공예시장으로 대체하였다.

쿠바 모자를 한번 쓰고 폼도 제보고













이것으로 쿠바여행을 마치고 8편 페루 리마로 갑니다



2019.3.19~2019.4.9 22일간의 중남미 여행기 6편

쿠바 하바나 가이드  현지인 마레

쿠바 하바나   2019.3.24


쿠바에서 하룻밤을 자고 오늘은 카테드랄 대성당과 구광장, 샌프란시스코 광장을 간다



카피톨리오라 부르는 옛날 국회의사당 건물이다.

워싱턴 국회의사당과 쌍둥이같은 모양인데 백악관을 지은 건축가가 지었다고 하여 그 유명세를 떨치고 있으나 식민지 유산이라는 오명은 벗을 수 없을 것이다.  현재도 중앙부처들이 국정운영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하바나 대극장이다. 오페라 극장인데 3년여에 걸쳐 대 보수를 하여 그 자태가  웅장하여 궁궐같은 느낌마저 들게 한다.

쿠바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를 갖고 있어 건물들 또한 스페인 풍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스페인 풍의 카테드랄(대성당)

이곳은 하바나에서 가장 아름답고 보전이 잘 되어 있는 광장이다.

광장을 둘러싸고 태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많은 건물들(롬빌로궁전, 마르퀴세테궁전.

식민지 시대의 예술 박물관(1972)이 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스페인 풍의 카테드랄(대성당)

카테드랄(Catedral)’이란 주교자가 있는 성당 즉‘두오모’를 뜻한다

스페인 풍의 카테드랄(대성당)

올드아바나의 카테드랄 데 산 크리스토발 성당

대성당안




올드아바나의 카테드랄 데 산 크리스토발 성당

성당안 미사연습에

성당안이 예수와 관련된 인물들이 가득차고


십자고상



제단위

제단위

제단모습




성전을 배경으로

아르마스광장 뒷골목 풍경

카테드랄 강장



설명에 여염없는 미아씨


카테드랄광장

레알 후에르사 요새다. 정복자 스페인 사람들이 해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고 한다. 물고 물리며 사는 것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들이기에 가능한 것일까, 하는데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레알 푸에르사 요새이다,

레알 푸에르사 요새이다,

해협을 끼고 있으니 해적 또한 없지 않았을 터, 그래서 해적을 막기 위해 만들어 졌다고 한다.



레알 푸에르사 요새이다,


어딜가나 요세는 수로에 쌓여


옛날에 쓰던 대포 안이 궁금해서




쿠바에서 가장 오래된 아르마스 광장 중앙에는 쿠바를 독립으로 이끈 영웅 세스페데스의 동상이 그의 기개를 느끼게 한다

쿠바에서 가장 오래된 아르마스 광장 중앙에는 쿠바를 독립으로 이끈 영웅 세스페데스의 동상이 그의 기개를 느끼게 한다











쿠바 여행 7편을 기대하세요


2019.3.19~2019.4.9 22일간의 중남미 여행기 5편

쿠바 하바나 가이드  현지인 마레

쿠바 하바나   2019.3.23


칸쿤을 출발하여 1시간 30분만에 카브리해 지역 최대도시 쿠바의 수도 하바나에 도착하였다.

여기애서는 한국인이 없어 현지인 가이드 마레 씨가 한국말을 배워 가이드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알아 듣기 힘들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알아들을수가 있었다.

먼저 간곳은 쿠바독립의 아버지 이자 쿠바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호세마르티 기념관 여기는

안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먼발치에서 구경만하였다. 이곳에서는 대통령이 거주하고있어 갈수가 없었다.

다음 쿠바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활을 하고있는 혁명광장에서 인정샷을 날리고, 존엄광장, 말레꼰 산책로를 관광하고 헤밍웨이 박물관을 투어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쿠바 하바나

쿠바 섬 북쪽 해안선의 서쪽 끝에 있는 경제·정치·문화의 중심지이다. 1976년에 실시된 행정개편 때 시의 경계가 확장되어 옛 아바나·마리아나오·레글라·과나바코아·산티아고데라스베가스 등으로 이루어진 도시지역이며, 정치적·행정적 단위이다.
기후는 열대성이지만 무역풍, 따뜻한 앞바다의 조류, 5~10월에 계속되는 우기 등으로 한결 완화된 열대성기후가 나타난다. 근채작물·커피·과일 등의 재배지로 중요하고 낙농업·가축생산지로도 유명하며 쿠바에서 가장 중요한 공업·수입·유통의 중심지로 수입·수출 교역은 대부분 아바나 항을 통해 이루어진다. 아바나는 옛날에 시의 중심지로 식민지시대의 정통양식으로 된 역사적 건물들이 많다
.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한 현대적 시가지에는 과거 식민지시대의 유적들과 현대적 건축물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항구 바로 곁에 있는 아바나는 옛날에 시의 중심지로 식민지시대의 정통양식으로 된 역사적 건물들이 많은 곳이다. 이 가운데 가장 뛰어난 건물은 1793년에 완공된 캡틴스제너럴 궁전이다. 라레볼루시온 광장 주변에는 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몇몇 현대적 건축물들이 있다.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아바나 성벽은 파괴된 채로 여전히 남아 있으며, 모로 성을 비롯한 오래된 군사건축물들도 그대로 남아 있다. 식민지시대의 아름다운 교회와 시민공원도 여러 개 남아 있다. 정부와 쿠바 공산당중앙위원회가 아바나 시에 있으며 아바나대학교는 훌륭한 교육기관으로 이름이 있다



혁명광장 호세마르티



혁명광장에는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던 호세 마르티를 기념하는 기념탑과 동상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쿠바하면 혁명가 체게바바가, 체르게바하면 혁명광장이 떠오르지만 

그는 알르헨티나 의사 출신이었으나 쿠바의 혁명을 이끌다가 미국 CIA 요원에 의해 피살당했다.

고향 아르헨티나보다 쿠바의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슴을 이 광장은 말해주고 있다.

쿠바 아바나 가이드 마레씨 설명이 진지하다.

호세 마르티를 기념하는 기념탑과 동상이


체 게바라 기념관.
체 게바라를 비롯 39명의 겔리 라 중 31구 사채가 이곳에 묻혀 잇고 체 게바라 박물관도 잇다.어릴 적 사진, 학교 성적표, 의대 졸업장, 의사 가운, 치과 도구들 카메라 등의 소장품과
카스트로와 찍은 사진, 부부 사진, 야구와 골프 침대에 누워잇는 모습 등 사진 등이 많이 있다.




쿠바는 자동차 수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어 5~60년대 차량들이 거리를 질주하고 있어

마치 시간여행이라도 온듯한 착각속에 빠지게 된다.  이차들로 영업을하면서 살아간다

멋진 영업용자가용 타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한번타는데 50달러






쿠바는 자동차 수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어 5~60년대 차량들이 거리를 질주하고 있어

마치 시간여행이라도 온듯한 착각속에 빠지게 된다



점심은 현지식으로 쿠바 음악을 들으며



사회주의의 모토가 그렇듯 쿠바는 나 혼자만의 삶보다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의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친절함과 배려가 몸에 밴 국민성을 갖고 있다.

또한 다인종 국가인지라 인종차별이 심한 때도 있긴 했으나 카스트로 혁명 이후엔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노력으로 지금은 가장 인종차별이 없는 나라로 손꼽힌다.

그 단적인 예가 시내를 질주하는 차량들이 5~60년 올드카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고,

우야든동 콜롬버스 말처럼 쿠바는 정말 아름다웠다.

쿠바하면 먼저 세계에서 몇 남지 않은 사회주의 국가라는 점과 카리브해의 진주라 불릴만큼 아름답기로 유명한 나라이다.

미국과 남 아메리카 대륙의 사이에 위치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열쇠라고도 불릴만큼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에 위치해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쿠바는 1959년 부터 우리와의 교류를 단절한 채 같은 사회주의 체제인 북한과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나 90년 들어  우리와 다시 수교를 맺고 지금은 많은 관광객들이 지구상 몇 안되는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를 아무런 장애없이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헤밍웨이 살던집

미국의 소설가. 제1차 세계 대전 때 종군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과 용감하게 싸우다 패배하는 인간의 모습을 간결하고 힘찬 문체로 표현했다. 대표작으로는 전쟁의 허무함과 고전적인 비련을 주제로 한 ‘무기여 잘 있거라’와 스페인 내란을 배경으로 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이 있다. 1952년에는 ‘노인과 바다’를 발표하여 195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장편 소설. 1930년대 스페인 내란을 배경으로, 젊은 대학 교수인 로버트 조던이 게릴라 부대에 참가하여 교량 폭파 임무를 수행하고 총에 맞아 쓰러지기까지의 일을 그리고 있다.
*줄거리 : 1937년 스페인 내란이 한창일 무렵 로버트 조던은 교량 폭파의 임무를 띠고 근처 동굴에 숨어들었다가 거기서 마리아라는 처녀를 알게 된다. 조단과 마리아는 곧 사랑에 빠지게 되고, 철교를 폭파하기 전날 밤, 마리아는 조단에게 자신이 파시스트에게 능욕을 당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일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이튿날 작전 개시를 앞두고 조던 일행은 적의 공격을 받지만 가까스로 철교를 폭파하는 데 성공하고, 철교는 두 동강으로 끊어진다. 비록 작전은 성공했지만 조던 일행은 적의 맹렬한 반격으로 인해 많은 인명 손실을 보고, 조던과 마리아, 몇몇의 게릴라들과 집시들만 살아남는다. 그들은 몸을 숨기고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조던은 마리아와 일행을 도피시킨 후 총을 맞으며 안간힘을 다해 미친 듯이 적을 향해 총을 쏘아대기 시작한다
.


노인과 바다

중편 소설. 195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늙은 어부가 물고기와 벌이는 사투를 통해 패배를 극복하고 절망와 허무를 뛰어 넘으려는 인간의 의지를 보여 준다.
*줄거리 :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는 늙은 어부 샌디에고는 84일간이나 고기를 못잡는다. 처음 40일은 한 소년과 같이 있었지만 고기를 잡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자 소년은 다른 배를 타게 된다. 어느 날, 노인은 큰 고기를 만나 사투 끝에 물고기를 잡는다. 항구로 돌아오는 도중 상어떼를 만나는데 사투 끝에 상어는 죽고 물고기는 뼈만 남게 되지만 노인은 만족해 한다. 마을 사람들은 고기 뼈를 보고 고기의 크기에 놀라며, 집에 돌아온 노인은 아프리카의 사자 꿈을 꾼다.


미국사람 헤밍웨이가 세째 부인과 함께 세계적 명작을

낳았던 집이다. 이 집도 그의 세번째 아내가 마련해 준 집이라고 한다.

세번째 부인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세계의 명작, 노인과 바다를 탄생시켰다고



미국사람 헤밍웨이가 세째 부인과 함께 세계적 명작을 낳았던 집이다. 이 집도 그의 세번째 아내가 마련해 준 집이라고 한다.

세번째 부인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세계의 명작, 노인과 바다를 탄생

헤밍웨이가 청새치 낚시를 즐기던 포구가 저 멀리 보인다.

자유분방한 그의 삶이 말해주듯 그가 남긴 유품들 역시 다양하고 취미 또한 다양했던듯 싶다.

카리브해의 푸른 바다와 하늘, 어두운 밤하늘을 수 놓았을 별들을 보며 그는 또 다른 글 소재로 상상의 나래를 폈을 것이다.

블랙, 린다 등 팻말이 보인다, 헤밍웨이가 반려견으로 기르던 고양이들의 무덤을 만들어 그들의 혼을 기리고 있다. 오른쪽 린다라는 팻말을 보고 나는 그 부인들 묘지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짐작을 했다.  그리고 블랙이라는 팻말을 보곤 이건 아닌데~ 사람 이름이 아닐지도 몰라~~~ 그랬다, 반려견


1899년 7월 21일 미국 시카고 교외의 오크파크에서 출생하였다. 고교시절에는 풋볼 선수였으나, 시와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고교 졸업 후에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캔자스시티의 <스타 Star>지(紙) 기자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인 1918년 의용병으로 적십자 야전병원 수송차 운전병이 되어 이탈리아 전선에 종군 중 다리에 중상을 입고 밀라노 육군병원에 입원, 휴전이 되어 1919년 귀국하였다. 전후 캐나다 <토론토 스타>지의 특파원이 되어 다시 유럽에 건너가 각지를 여행하였고, 그리스-터키 전쟁을 보도하기도 했다. 파리에서 G.스타인, E.파운드 등과 친교를 맺으며 작가로서 성장해간다.

헤밍웨이가 입던 군복

 

헤밍웨이는 61년 미국과 쿠바의 단교로 7년의 쿠바생활을 접고

본국 미국으로 돌아가지만 2년뒤 우울증, 편집증, 알콜중독으로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쿠바의 지도자 카스트로는 헤밍웨이의 열혈 애독자 중 한사람이었다.

태어난 조국보다 더 사랑했던 쿠바에서 쫒겨난 상실감이 그를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헤밍웨이는 아프리카 사냥 경험을 소재로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이라는 수필집을 남겼다.

벽에 걸린 동물 박제들은 모두 그가 직접 사냥을 통해 얻은 그가 남긴 문학작품만큼 큰 유산이 아닌가 싶다.


자유분방한 그의 삶이 말해주듯 그가 남긴 유품들 역시 다양하고 취미 또한 다양했던듯 싶다.

카리브해의 푸른 바다와 하늘, 어두운 밤하늘을 수 놓았을 별들을 보며 그는 또 다른 글 소재로 상상의 나래를 폈을 것이다


헤밍웨이집에서 본 시내풍경 아름답기만하다.

헤밍웨이는 61년 미국과 쿠바의 단교로 7년의 쿠바생활을 접고  본국 미국으로 돌아가지만 2년뒤 우울증, 편집증, 알콜중독으로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쿠바의 지도자 카스트로는 헤밍웨이의 열혈 애독자 중 한사람이었다.

태어난 조국보다 더 사랑했던 쿠바에서 쫒겨난 상실감이 그를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0년간의 침묵을 깨고 발표한 『강을 건너 숲 속으로』(1950)는 이전 소설의 재판(再版)이라 해서 좋지 못한 평을 얻었지만, 다음 작품 『노인과 바다』(1952)는 대어(大魚)를 낚으려고 분투하는 늙은 어부의 불굴의 정신과 고상한 모습을 간결하고 힘찬 문체로 묘사한 단편이다. 심볼리즘과 운율을 유감없이 구사하여 그린 용기 있는 한 남성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생전에 쓰기를 벼르다가 끝내 쓰고야 만 작품”이라고 작가 자신이 말한 니힐리즘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 작품으로 헤밍웨이는 ‘1953년 퓰리처상’과, ‘195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헤밍웨이가 즐겨 탔던 보트다. 아마 이 보트를 타고 노인과 바다의 모티브가 됬던 청새치 낚시를 즐기지 않았을까 싶다.

헤밍웨이 집앞에서 작가를 생각하는 필자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쿠바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으며, 3번째 결혼 역시 파탄에 이르자 4번째로 런던에서 만난 통신원 메리 웰시와 결혼해 여생을 함께 보냈다.

헤밍웨이 집앞에서 쉬면서 포즈도 취해보고


헤밍웨이 기념품 가계

기념품들이 조잡하여 살만한것이 없다


종군기자 경험을 살려 <무기여 잘있거라> 라는 명작을 남겼고,

에스파니아 내전을 생생히 그려낸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라는 작품은

그를 죽어도 죽지 않는 불멸의 작가로 다시 태어나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살아가고 있다


헤밍웨이는 이 호텔에서 집필 활동을 많이 한걸로 유명하고 쿠바의 독재자 카스트로 마저도

그의 작품 애독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쿠바의 혁명후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자

헤밍웨이는 그 이듬해 본국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의 삶도 비극적으로 마감하고 말았다.

만약에, 어쩌면~등 이런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그래도 만약에 만약에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세계의 문학사는 크게 달라져 있지 않았을가 하는 아쉬움마저 든다.

쿠바의 내전을 기억하라고 남겨진 유물들

노인과 바다의 배경지 코히마르,

대어를 낚아 만선을 이루고자 거친 파도와 싸우던 늙은 어부의 치열한 삶을 그려냈던 작품 노인과 바다로 그는 노벨 문학상을 거머 쥐었다.

중학교때 숙제로 읽었던 그 작품을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읽는 계기가 되었고 내 여생을 그리는 밑 그림이 되는 여행이 되기에 충분했다.


노인과 바다의 배경지 코히마르, 성 전망대 겸 등대

곳곳에 세워진 헤밍웨이 동상  쿠바는 헤밍웨이가 먹여살린다는 얘기도

헤밍웨이 동상을 가리키는필자

전망대 안에서도 호세마르티 사진들이


기념으로 인정샷을 남기고




엘모로 요새


쿠바 공동화장실 화장실 문이 없다  중국서 배웠는가?


저녁식사 쿠바음악과 함께




호텔에서 제공한 칵테일술 모지토를 한잔씩


comodoro hotel class  호텔앞 바다 수영장 날씨가 추워 한번해보지 못하고


우리가 묵었던 호텔 comodoro hotel class  여기서 이틀밤을 보냈다.


와인 공장 옛날 제조방법을 자세히 설명하여 놓았다 가이드가 특별히 보여준 선물

가이드 미아 씨가 와인공정을 설명하고

쿠바의 자좀심 국기 어딜가나 국기가

가지가지 와인 구경하기

쿠바 커피 구경하기

쿠바 자유시장 구경






쿠바의 아름다움 시작 다음 6편을 기대하세요

 

 









2019.3.19~2019.4.9 22일간의 중남미 여행기 4편

멕시코 가이드  김국현실장

멕시코 칸군여행  2019.3.22

멕시코여행의 주의사항 미국에서 멕시코올때와 멕시코 국내여행시에는 큰가방을 꼭 잠물쇠로 채울것

큰가방을 열쇠를 어떻게 열고 간단한 전자제품등을 비행기장에서 훔치는지 번호키는 100%

다열고 꺼내가니 대단한 주의가 필요하다.

중남미여행 4일째 오늘은 멕시코 칸쿤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뽑힌 마야유적 치첸이사로 간다

천문학지식을 예술적인 건축물에 담아낸 일년365일의 의미하는 91계단 피라미드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많은 기둥으로 이루어진 점사의 선전

비의 신인 차끄가 산다고 전해내려오는 동굴안 웅덩이 세노때 연못

그리고 칸쿤섬의 전체를 바라볼수있는 엘또래 전망대  자 지금부터 떠나보자.


멕시코 칸쿤

유카탄 반도의 북동쪽 해안선에서 조금 떨어진 L자 모양의 섬(남북길이 21㎞, 동서길이 400m)에 있다. 편의시설이 밀집되어 있는 본토의 시와 이곳의 휴양지는 둑길로 연결된다. 행정구역상 칸쿤 시에 속하는 칸쿤 섬과 해안지역에는 백사장·야자나무숲·산호초 등이 풍부하며, 킨타나로오 주 남쪽의 정글과 같이 1년 내내 우기가 없다.


원주민은 마야족이다. 이곳에 관해 미국인 존 로이드 스티븐스와 영국인 프레더릭 캐서우드의 고전적인 탐험저서 〈유카탄을 여행하며 생긴 일들 Incidents of Travel in Yucatan〉(1843)에 최초의 기록이 있다. 이 책에는 이곳의 지명이 '무지개가 끝나는 곳에 있는 배'라는 뜻의 마야어인 칸쿠네(Cancúne)로 기록되어 있다.


1970년까지는 100여 명의 마야인들이 낚시와 채집을 하며 지내는 조그만 마을이었다. 그러나 1970년 민간기업과 멕시코 정부가 공동으로 3년간 컴퓨터를 이용한 지정학적 조사를 한 결과, 칸쿤은 국제적인 휴양지로 개발할 만한 최적의 장소로 선정되었다. 개발이 시작된 후 세계 각지로부터 관광객들이 꾸준히 몰려들었으며, 칸쿤 휴양지 개발계획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심각한 주택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아 중심가에서조차 3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원시적인 움막에서 살고 있다.

북쪽의 푸에르토후아레스, 남쪽의 푸에르토모렐로스와는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시에서 남쪽으로 19㎞ 떨어진 곳에 국제공항이 있다. 

 

칸쿤(Cancún)은 멕시코 남동부, 카리브해 연안의 킨타나로오 주(Quintana Roo)에 있는 도시의 이름. 마야어로 칸은 "뱀" 쿤은 "둥지라는 뜻으로 뱀의 둥지라는 뜻이다.


CANCUN BAY RESORT HOTEL  우리가 묵었던 호텔 수영장

멕시코 남동부의 카리브 해안 유카탄 반도의 끝에 위치한 관광 도시로 1970년대에 멕시코 정부의 주도로 휴양지로 개발되었다. 현재는 연간 300 만명 이상의 관광객과 유명 인사들이 방문하여 세계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휴양지가되었다. 근처에 세계유산 치첸이트사(Chichen Itza)와 리조트외에 스칼렛(Xcaret)과 셀하(Xelha), 툴룸(Tulu'um)등의 유적이 있으며, 이러한 유적과 세트로 해서 칸쿤에 오는 사람도 많다.

호텔앞 카리브해변

호텔앞 카리브해변

호텔앞 카리브해변에서 새벽6시 일출 인정샷

호텔앞 카리브해변에서 새벽6시 일출

호텔앞 카리브해변에서

호텔앞 카리브해변에서 일행이 열심히 사진을 찍고

호텔앞 카리브해변에서

호텔앞 카리브해변에서

칸쿤은 젊습니다. 도시도, 사람들도 젊죠. 원래 작은 모래톱이 있던 이곳 칸쿤은 약 35년 전 쯤 멕시코 정부의 계획에 따라 휴양지로 조성되어, 21세기의 대표적인 휴가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오늘날 칸쿤은 해변을 따라 들어선 중간 규모의 시가지와, 길고 가느다란 섬, 그리고 북쪽과 남쪽에서 각각 해안과 섬을 이어주는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멕시코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마야 문명의 유적지인 치첸이트사는 칸쿤에서 차로 약 3시간 가량 떨어져 있습니다

치첸이트사와 다른 고대 도시들의 위치


치첸이트사에 있는 유적들의 위치를 나타낸 그림

치첸이트사에 있는 유적들의 위치를

치첸이트사에 입장권구입

치첸이트사 정문

치첸이트사에 있는 기념품가계들

마야유적 치첸이사 입장료 24달러  

치첸이트사

마야어를 분석해보면 그 먼 조상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작은 부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 부족이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쯤 대륙의 남쪽으로 내려와 정착했다는 것이다. 마야문명은 멕시코 남쪽, 유카탄반도, 콰테말라 일대가 중심지였다.


세게 유네스코 기념비

세게 유네스코 기념비 설명하는 김국현가이드


천문학지식을 예술적인 건축물에 담아낸 일년365일의 의미하는 91계단 피라미드

치첸이트사(chichen itza)

치첸이트사는 1988년에 세계 유산으로 등록된 멕시코 고대 마야, 톨텍 문명의 유적이다. 5세기경에 성립된 후 7세기 ~ 8세기 사이에 쇠퇴했다. 그러나 10세기 전후로 재건되었다.

치첸이트사는 북쪽의 비교적 새로운 유적인 신치첸과 남쪽의 오래된 유적인 구치첸으로 나눌 수 있는데, 신치첸에 비해 구치첸이 더 복잡하다. 북쪽에 있는 유명한 피라미드와 주변에 있는 구기장과 신전, 시장 등이 있다. 남쪽에는 대신관의 묘와 수도원, 카라콜이라는 탑 등이 있다.

구기장을지나서

치첸이트사의 쿠쿨칸의 피라미드(El Castillo)

마야족이 유카탄반도에 건설한 도시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치첸이트사이다. 물이 부족한 유카탄반도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치첸이트사에는 세노테가 두 군데 있다. 두 곳 모두 깊이 40미터 직경 60미터 정도 되는 커다란 샘이다. 두 샘 사이의 거리는 1.6킬로미터이다. 하나는 주민들의 식수와 농업용수로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황금의 샘’으로 알려진, 비의 신 차크(Chac)에게 제물을 바치는 신성한 샘이었다. 마야인들의 신화에 따르면 세계는 신들의 희생으로 탄생했고 인간은 세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신들에게 산 제물을 바쳐야했다.

멕시코 칸쿤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뽑힌 마야유적 치첸이사

마야족 설화에 따르면 12~13세기경 마야족 사회에 외국인 한 명이 포로로 잡혀 들어왔다. 마야인들은 그를 쿠쿨칸(초록 날개가 달린 뱀)이라 불렀고 비의 신 차크에게 바치는 제물로 성스러운 샘 속에 던졌다. 그러나 쿠쿨칸은 죽지 않았다. 마야인들은 그를 건져낸 후 ‘살아 있는 신’으로 받들었고 그는 치첸이트사의 지배자가 되었다. 마야인들은 신전을 지어 그에게 바쳤다.

9세기 톨텍의 왕 케찰코아틀(Quetzalcoatl)은 유카탄에서 가장 부유한 치첸이트사를 정복했다. 톨텍과 관련 있는 이트사인들에게 정복당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치첸이트사가 마야어로 ‘샘 어귀에 있는 이트사의 도시’라는 뜻을 지니기에 나온 말이다. 치첸이트사를 보면 건축 · 조각 · 그림, 심지어는 관습까지 마야와 톨텍의 문화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문화의 혼합은 1400년 도시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버려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치첸이트사 유적지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비교적 오래된 고전 시대의 건축물은 치첸 비에호(Chichen Viejo)에 주로 있고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은 치첸 누보(Chichen Neuvo)에 있다.


치첸이트사를 대표하는 유적인 쿠쿨칸의 피라미드 엘 카스티요

유명한 쿠쿨칸의 피라미드 엘 카스티요(El Castillo, 성채)는 평원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피라미드는 마야족의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보여준다. 9층으로 된 피라미드의 사면에는 각각 91개의 가파른 계단이 있고 정상의 제단까지 합하면 1년의 날 수와 같은 365개가 된다. 게다가 사면에서 52개의 판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1년의 주일 수를 상징한다. 신기한 것은 중앙 계단 앞에 서서 손뼉을 치면 정상 부분에서 째지는 듯한 소리가 메아리친다는 사실이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박수를 치면서 이 메아리를 확인한다

멕시코 칸쿤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뽑힌 마야유적 치첸이사

신 세계 7대 불가사의(New Seven Wonders of the World) – 고대 7대 불가사의와 별개로 스위스의 한 재단에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투표를 거쳐 선정한 것입니다. 최종 후보지를 21곳으로 추리는 데만도 수 년이 걸렸고 마지막 투표에는 1년 이상의 시간을 소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뽑힌 신 세계 7대 불가사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멕시코의 치첸이트사, 중국의 만리장성, 이탈리아의 콜로세움, 페루의 마추픽추, 인도의 타지마할, 요르단의 페트라, 브라질의 예수상.

엘 카스티요의 한쪽 계단 아래에 있는 조각상 케찰코아틀

케찰코아틀은 초록 날개의 뱀을 뜻하는데 마야인들이 숭배하던 신성한 신이다



엘 카스티요(쿠쿨칸의 피라미드) 정상에서 구기장 쪽을 바라본 모습





마야인들이 비의 신 차크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치며 신성시했다는 황금의 샘

‘황금의 샘’ 전설은 1549년 유카탄 지방의 이사마르 수도원에 온 에스파냐의 프란시스코파 수도사 디에고 데 란다(Diego de Landa, 1524~1579)에게서 유래했다. 그는 마야인들을 기독교도로 개종하려면 그들의 신앙을 철저히 없애야 한다면서 마야의 기록 문서를 모두 불태우고 유적들을 파괴하여 마야인들이 가장 경멸한 사람 중 한 명이다. 마야인들의 사회적 습관 · 풍습 · 역법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란다는 마야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유카탄 사물기》에 낱낱이 적었다. 마야문명의 파괴자가 동시에 마야문명의 최고 해설자가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장난이라 할 수밖에 없다. 란다는 그 책에서 ‘황금의 샘’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 지방 사람들은 가뭄이 닥칠 때 신에게 희생의 제물로 산 사람을 샘물에 던졌다. 던져진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또한 희생자 외에도 많은 보석과 귀중품을 던져 넣었다. 인디언의 샘에 대한 신앙은 절대적이어서 만약 이 지방에 금이 있었다면 대부분 샘물 속에 있을 것이다.”

란다의 기록에 따르면 희생자는 대부분 젊은 처녀들 중에서 선정되었는데 선정된 희생자들은 호화로운 보석으로 몸을 꾸미고 쿠쿨칸의 피라미드 위에 있는 신전에서 샘으로 통하는 사쿠베(성스러운 길)를 따라 행진했다. 샘 서쪽에 있는 작은 신전에 도착한 처녀들은 발체(최음제)라는 술을 마신 뒤 샘의 남쪽 끝에 있는 기단에서 차례로 깊은 샘물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이때 처녀들은 몸을 던지기 직전에 머리에 날카로운 일격을 받았다고도 하며 처녀들의 가슴을 칼로 도려낸 후 심장만 샘 속에 던지거나 머리만 던져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


마야인들이 신성한 샘에 소녀를 제물로 바치는 장면을 상상한 그림

비의 신인 차끄가 산다고 전해내려오는 동굴안 웅덩이 세노때 연못

엘 카라콜(El Caracol)이란 천문대는 마야족의 높은 천문학 수준을 보여준다. 둥근 탑 내부에 나선형 계단이 있는 엘 카라콜을 에스파냐인들은 ‘달팽이’라 불렀다. 사제들은 천문대를 통해 정확한 시간을 측정했다. 치밀하게 계산해 만든 창문을 통해 햇빛이 정확하게 1년에 두 번씩 천문대의 중앙까지 들어왔기 때문에 사제들은 이것으로 날짜와 시간을 알 수 있었다.

엘 카라콜은 서기 1000년 금성이 뜨고 질 때 수평선과 만나는 점들 중 양극단에 있는 점에 방향이 맞추어져 있으며 태양의 분점 · 하지점 · 월몰점 · 정남향과 정서향을 정확히 바라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금성은 마야에서 특별한 숭배의 대상이었다. 마야 천문학자들은 금성 달력을 따로 만들었는데 481년 동안 두 시간 이내의 오차가 생길 정도로 정확했다.


카툰이란 단위로 시간을 측정했던 그들은 3세기부터 이미 0과 20진법을 사용했을 만큼 과학 수준이 높았다. 20진법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전부 합치면 20개인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들은 분수를 알지 못했지만 바빌로니아인처럼 계산을 돕는 곱셈표를 만들었다. 0의 사용은 인도보다는 300년, 아라비아 상인들보다는 700년 정도가 앞서는 것이다. 그들은 이 숫자 체계를 이용해 하늘의 운행, 시간의 경과를 계산했고 태양력을 만들었다.

마야인들은 아브라는 윤년을 갖고 있었는데 아브는 각기 20일로 이루어진 18개월과 5일로 이루어진 ‘짧은 달’로 이뤄졌고 1년을 365.2420일로 계산했다. 근대의 엄밀한 계산에 따르면 1년은 365.2422일인데 그들의 계산과 거의 차이가 없다. 또한 달의 주기를 29.5320일, 금성의 주기를 580일로 계산했고 그 오차는 달의 경우 0.00039일, 금성은 0.08일에 지나지 않는다.

마야 학자 에릭 톰슨은 “역사상 다른 어떠한 민족도 마야만큼 시간의 문제에 깊이 흥미를 가진 적이 없다. 또한 다른 어떤 문화도 이만큼 이상한 과제를 심오하게 발전시킨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마야인들은 운반용 수레나 철제도구를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기술적으로 낙후한 면도 있었다.


천문대에서 의식을 치르는 마야인들의 모습을 상상한 그림

인정샷도 남기고

엘 카스티요의 윗부분으로 정상에 신전이 있다.

전사의 신전

엘 카스티요의 동쪽에는 1000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전사의 신전이 있다. 톨텍족의 건축 방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 주위로는 무장한 전사의 화려한 모습이 무수하게 새겨진 기둥들이 있는데 짚을 얹은 나무 지붕을 받치고 있다. 이는 마야 건축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특이한 형태이다.

전사의 신전은 높이 30미터, 기대 면적 60제곱미터의 피라미드형이며 급경사 계단을 올라가면 제단 위의 ‘차크 몰(Chac-Mool)’ 신상이 보인다. 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워 있는 모습도 아닌 이 신상은 상체를 45도 각도로 들고 있고 발목을 엉덩이에 붙인 채 두 무릎을 바로 세우고 있다. 얼굴은 왼쪽으로 향한 채 끝이 안 보이는 어딘가를 응시하면서 두 손은 가지런히 모아 배 위의 접시를 받치고 있다. 이 접시 위에 사람의 심장을 바쳤다고 한다.

이 신전에서 비의 신이 살고 있는 성스러운 샘까지는 너비 4미터, 길이 400미터의, 돌이 깔린 도로로 이어져 있으며 도로 양편에는 날개 달린 뱀의 신 쿠쿨칸의 조상 수백 개가 난간처럼 줄지어 서 있다.


전사의 신전 위에 있는 성소의 차크 몰 신상

차크 몰의 배 위에는 접시가 얹혀 있는데 마야인들은 여기에 사람의 심장을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많은 기둥으로 이루어진 점사의 선전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많은 기둥으로 이루어진 점사의 선전

마야문명은 최전성기를 누릴 때 갑자기 사라졌다. 마치 예정된 운명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나의 민족이 전쟁으로 멸망하는 예는 흔히 있다. 그러나 마야에서는 그런 전쟁이 일어난 흔적이 없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흔적도 없다. 문명의 후계자도 전설도 하나 남기지 않았다. 수많은 마야인들은 그들의 찬란한 밀림 문명과 함께 그야말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어울리는 인정샷

멕시코 특유의 모자 살려고 하다가 가방에 넣을수 없어 포기

특유의 장면으로 사진을 찍은 관광객들

구기장  입구

구기장

이 경기는 특정 사람만 참가할 수 있는 신성한 행위였다. 패자는 목이 베어져 제단에 장식됐는데 승자 역시 희생 제물로 바쳐지곤 했다. 구기장의 ‘두개골의 벽’에는 이런 풍속이 조각되어 있다. 마야의 창세 신화인 포풀 부(Popul Vuh)에도 영웅들이 주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구기장에서 악마에게 도전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구기장 벽의 8미터쯤 높이에 있는 둥근 돌고리

이곳에서 마야인들은 죽음의 제례라고 할 수 있는 신성한 경기를 펼쳤다.


구기장 벽의 8미터쯤 높이에 있는 둥근 돌고리

구기장 벽면 하단에 새겨진 부조로 경기의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선수들 중 한 명이 종교적 희생양으로 참수를 당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힘든여정속에서 한폭의 추억의 남기고자 노력하는 필자

치첸이트사를 대표하는 유적인 쿠쿨칸의 피라미드 엘 카스티요를 배경으로 멋진나래를 펼치는 필자

점심식사장의 민속공연

지나가는길에 자그마한 아름다운 성당이 있어 제대를 잠시 들러보고 기념사진을

칸쿤시내를 볼수있는 전망대 매표소

칸쿤섬의 전체를 바라볼수있는 엘또래 전망대 

전망대 입장권

전망대에서 바라본 카브리해와 칸쿤시내

전망대에서 바라본 카브리해와 칸쿤시내 

전망대에서 바라본 카브리해와 칸쿤시내

전망대에서 바라본 카브리해와 칸쿤시내

전망대에서 바라본 카브리해와 칸쿤시내  모두가 호텔과 리조트

전망대에서 바라본 카브리해와 칸쿤시내

전망대에서 바라본 카브리해와 칸쿤시내

전망대에서 바라본 카브리해와 칸쿤시내

전망대에서 바라본 카브리해와 칸쿤시내


전망대에서 내려와

캐리비안의 바다는 다른 바다와 달리 터키석 같은 파란 빛입니다. 따뜻한 바다는 눈부시도록 하얀 모래 사장과 어우러져 꿈 같은 해변 풍경을 완성하죠. 칸쿤의 바다를 보고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있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칸쿤의 니춥테 석호(Nichupte lagoon), 이슬라 무헤레스(the Isla Mujeres), 콘토이 섬(Contoy Island) 같은 곳으로 보트를 타고 떠날 수도 있어요. 칸쿤에서는 매일 이곳으로 향하는 보트가 출발합니다. 선택할 수 있는 배의 종류도 다양해요. 현대식 모터를 갖춘 요트, 뗏목, 그리고 돛단배도 있죠. 스노클링과 조식, 점심 식사, 쇼핑 투어 등이 포함된 프로그램도 있으니 일정에 맞게 잘 선택하면 됩니다.


호텔앞 수영장과 카리브해


호텔앞 수영장과 카리브해


칸쿤전망대 높기도하다

쿠바입국카드







중남미 여행기 갈수록 재미있는 쿠바 하바나 5편을 기대하세요


 


 

 


2019.3.19~2019.4.9 22일간의 중남미 여행기 3편

멕시코 가이드  김민정

중남미 여행 3일째

오늘은 중남미 여행 3일째 어제는 아즈택문명의 발상지를 관광하고 오늘은 아메리카 대륙

최대의 고대유적지의 신들의 도시 테오티와칸 피라미드를 관광하러 아침일찍 출발하였다.

해와 달의 피라미트 물과 농경의신. 인신공양의 거리등 테오티와칸의 문명을 살펴본다

해발 2300M 고지에 세워진 피라미드 지금 떠나보자.......


테오티우아칸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Teotihuacán [teotiwa'kan])은 멕시코의 자랑인 거대 유적이며 신대륙 발견 이전의 미주대륙에 세워진 가장 거대한 피라미드 건축물들이 위치해있는 곳이다. 그러면서도 누가 지었는지, 언제 지었는지 확실하게 알려진것 하나 없는 수수께끼 유적이다. 테오티우아칸이라는 이름은 또한 멕시코 중부에서 가장 광대한 넓이를 가진 이 도시가 문명 또는 문화의 중심지로서 언급되기도 한다. 이 고고학 유적은 피라미드 건출물 외에도 ‘죽은자의 거리’로 불리는 대규모 주거단지와 다채롭고 잘 보존된 상태의 벽화들로도 유명하다.


테오티우아칸은 신대륙 발견 이전의 미주대륙에 위치했던 도시들중 가장 큰 도시이며 서기 원년~500년 사이에 정점을 맞았다. 절정기 동안의 이 도시 인구는 10만에 육박하였는데 이는 같은 시기의 전 세계 모든 도시를 통틀어 가장 많은 인구 수이다. 이 유적지에 거주한 문명 또는 문화집단은 테오티와칸 문명[teotiwakan] 또는 테오티와카노[teotiwakano]라고 불린다.


테오티우아칸이 제국의 수도였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메소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영향을 미쳤음을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테오티와카노 문명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많은 증거들이 베라크루즈와 마야 지역의 많은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테오티우아칸에 거주했던 주민들이 어느 부족이었는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로는 나와족, 오또미족 또는 또또낙족이 가장 유력한 후보들로 꼽히고 있다. 몇몇 학자들은 테오티우아칸의 거주민들이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한다.


테오티우아칸 유적은 멕시코의 멕시코주, San Juan Teotihuacan 자치도시에 위치해 있으며 멕시코시티로부터 북동쪽으로 대략 40km [25mi]지점에 위치해있다. 유적지의 총 면적은 83 km²에 달하며 1987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멕시코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가는 유적에 속한다.


아침 호텔에서 출발

거리에서 아침식사하는 멕시코인들


천사독립기념탑  새벽에 호텔에서 나와 촬영을하고

천사의 독립기념탑(일명, 소나로사 기념탑) 상층은 순금 5톤으로 천사가 조각돼 있다

멕시코의 면적은 한반도의 9배 규모이며, 인구는 12천만 명이라고 한다. 언어는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화폐단위는 페소(U$=12페소)로 표시에서 SI자가 그려져 미국화폐 단위와 혼란이 있다

한인 타운(교민은 약 15,000명 정도)이라고

하층은 멕시코 독립투사들이 조각되고, 아래 지하에는 독립투사들이 유골이 안치되어 있어 멕시코시티를 상징하는 탑이라고 한다.


차창 밖으로 본 멕시코시티의 달동네  

테오티와칸(Teotihuacan)으로 가는 길 -

  2,100만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는 멕시코시티의 달동네는 밤에 아름다운 야경을 보여 주지만, 선진국으로서 후진국을 떠나지 못하는 양면성을 보여 준다. 외환위기를 두 번 겪고 난 후부터 빈부격차, 부정부패, 정경유착이 심화되어, 지하자원이 풍부한데도 서민들의 삶은 어렵다고 한다



멕시코의 상징 흔히 보이는 선인장 들

멕시코하면 떠오르는 챙이 넓은 모자와 함께 선인장들이 곳곳에 있다.

테오티와칸 입구 매표소

태양의 피라미드 (Piramide Del Sol)

햇빛에 말린 일억개의 벽돌을 쌓아 만든것으로 기원전 2세기에 세워졌으며 밑변 225m 높이 65m의 피라밋으로 신전의 기단이며, 이집트 피라미드와 같은 석실과 묘는 없다. 대부분의 고대문명이 그렇듯 태양과 달을 숭배했던 테오티와칸 인들에게 태양의 피라미드는 정신적 중심을 잡아주었을 것이다. 태양의 피라미드정상에 다달으면 주변 유적지가 한눈에 들어온다.테오티와칸내의 건축물 중에서도 최대의 건축물로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피라미드다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650년 사이 존재했다고 여겨지는 테오티와칸은 중앙 아메리카문명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문화를 이룩했다고 한다. 테오티와칸이 있는 곳은 해발 2,300m의 멕시코 중앙고원으로 남북을 있는 중요한 지점에 있다.




태양의 신전 앞 입구에서 기념품을 가계들

아메리카 최초의 메트로 폴리탄을 형성했었고, 문명의 전성기에 그 인구가 12만 5천 가량에 달했지만 7세기 중반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후에 사람들이 사라지고 없어진 분지의 한복판에 방치된 테오티와칸을 찾아온 아즈테카인들은 장엄한 피라미드를 보고 이것이야말로 신들이 만든 도시라고 밎고 자신들의 우주관인 '태양과 달의 신화'의 무대로 삼았다. 현재의 '태양의 신전' '달의 신전'이란 명칭도 아즈테카 신화가 투영된 것이다.



테오티와칸 유적 (Teotihuacan)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18평방Km 에 이르는 대유적지. 그 기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설에는 최고 고대문화의 하나인 오르메카 문화의 영향을 받은 토르테카족이 기원전 2세기경에 건조 하였고, 기원후 7세기에 와서는 인구 10만명에 이르는 번영을 누렸으나 14세기 아즈테카족이 침범하자 폐허화되었다고 한다. 아즈테카족이 이 유적을 처음 본 순간 그 장엄함에 감명을 받아 테오티와칸(신들이 태어난 장소)이란 이름을 붙인데서 유래되었다. 


아즈텍 문명의 유적지 테오티와칸(Teotihuacan) -

  멕시코시티의 북쪽 약 50km 되는 곳에 있는 테오티와칸의 피라미드 군은 기원전 2세기경에 건축된 라틴아메리카 최대의 도시 국가로 당시의 인구는 150,000~ 200,000명이 살았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집트의 피리미드는 무덤의 개념인데 비하여 멕시코는 신전으로 서로 다르다. 이곳에서 제일 규모가 큰 태양의 피라미드(높이 65m, 밑변의 길이가 225m)는 세계에서도 세 번째[1위는 멕시코 남단에 있는 2/3정도 훼손된 촐룰라(Cholula)피라미드, 2위는 이집트 쿠푸 왕 피라미드]라고 한다.


멕시코 방속국 PD와 기념 촬영도하고

오늘 축제 행사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방속국에서 취재 열기도 대단하다.

유적지의 기념품가계는 여전하고

사자(死者)의 길 (La Calle De Los Muertos)

유적을 가로질러 남북 4Km에 이르는 돌로 만든 대로로 처음 테오티와칸 유적지를 찾은 아스테카인들이 이 길에서 많은 사람들의 유골을 발견했다하여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이 대로는 1년에 2번 해의 피라미드 정점에 해가 오게하고 저녁에는 정면으로 해가 지게 하기위해 방위를 동쪽으로 틀어 축조되었다. 길은 북단과 남단이 2.7m의 낙차가 있으나 완만하게 경사져 있다.


오르기 전 태양의 신전을 배경으로 

'태양의 피라미드는 모두 4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높이가 63m이다. 밑변의 길이는 가로 220m 세로230m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맞먹는 크기인 태양의 피라미드는 계단이 252개에 이른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태양의 피라미드는 큰 규모의 건축물인데 이것이 완공되었을 때 당시 사람들은 그 엄청나 규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학자들은 태양의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 3천여명이 적어도30년은 쉬지 않고 작업했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축제의 행사장 민속춤이 계속이어진다

우측으로 오로기 시작하는 태양의 신전

신전위에서 내려다본 축제의 현장


오늘 축제일을 맞아 많은 관광객들이 몰렸다.

미국에서온 꼬마 기념으로 볼펜을 주니 반가워서 기념촬영까지

오른쪽으로 오르기를 반복 워낙인파가 많아 휩쓸려서 올라간다 땀도나고 힘도들고

신전위에서 내려다본 축제현장

오르는 방향 우측에 있는 물과 농경의 신전 조망

물과 농경의 신전 반대편 방향, 달의 신전 조망

정상에서 팔을 벌려 태양의 정기를 받는 포즈

태양의 신전(태양의 피라미드) -

  쌓아 올린 돌의 모습을 보며 당시의 수학적, 시멘트 공법 등 건축기술이 뛰어났음을 입증한다. 시멘트 반죽에 작은 검은 돌을 박아 놓은 것은 강렬한 태양 볕으로 부터 훼손을 막기 위함이다. 당시 숭배했던 깃털 달린 뱀 조각상을 보고 오르기 시작한다. 강렬한 햇볕을 피할 곳이 없어 모자와 선크림을 바르고, 한 면만 계단이기에 우측통행이다. 또한 주위에는 살만한 곳이 없기 때문에 간단한 물과, 음료수, 간식 등이 필요하다. 기 받는 명소로 알려져 관광객들은 태양을 향해 팔을 벌린다.

너나 할것없이 기 받는 명소로 알려져 관광객들은 태양을 향해 팔을 벌린다


멕시코에서 소풍나온 가족들과 인정샷


우리 일행도 관광객들과 같이 기를 받고

우리 일행도 관광객들과 같이 기를 받고


우측통행으로 내려올 때에도 계단이 급경사라 조심 >

  여러 피라미드 중에서 태양의 신전은 오랫동안 풍화작용에 의해서 흙속에 파묻혀 있다가 자국민에게 발견되어 완전한 형태로 복원되었다. 스페인 강점기에는 피라미드를 헐어 성당을 짓는 자재로 많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다른 피라미드들도 원상태로 복구되었고, 주변의 언덕에서 흙만 제거하면 유물들이 나오고 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멕시코시티 자체의 고도가 2,240m로 높고, 45도 정도의 급한 계단을 오르려면 힘들어 테라스에서 대부분 쉬었다 오르지만,


단체로 나온 신자들의 함께 기도와 건강을빌고

멕시코 발송국 기자들과 인터브도 5분정도하고 전세계로 퍼져나간 인터뷰

아름다운 맥시코를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더 늦기전에 여행을 꼭한번씩 해보시라고 소개

미국 꼬마를 또 만나 촬영을하고

신전에서 내려다본 축제장

옛 집들이 유적으로 남고

사자(死者, 죽은자)의 길 과거 아즈텍카 사람들은 달의 피라미드를 인신공양(人身供養)의 장소로 사용했다.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앞의 넓은 길을 오늘날에는 '죽은 자(死者)의 길' 이라고 부른다. 

축제의 현장 끝날줄모르고 계속된다 잠시 이들과 함께 춤을추기도 하고

사자의 길, 옆에는 벽화들이(푸마) 대로 옆에는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으나, 풍화작용에 의해 훼손되었다. 유일하게 복원된 푸마가 물에서 헤엄치는 모습이 많은 죽은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는 듯하다. 길 중앙에는 자연에서 여러 가지 색상을 추출해 내는 모습을 실연한다






태양의 신전앞의 사자상






독수리 모양의 벽화 인상적이다

벽화의 모양이 특이하여 몇장을

사자(死者)의 길 -

  내려오는 계단은 쉽지만 경사가 급해 조심하게 된다. 테오티와칸을 남북으로 관통하여 달의 신전까지 가는 대로를사자(死者)의 길이라 한다. 아즈텍의 제사 방식은 사람의 심장을 꺼내어 받치는 인신공양(人身供養)을 해서 미개했다는 평을 받는다. 대로 옆에는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으나, 풍화작용에 의해 훼손되었다. 유일하게 복원된 푸마가 물에서 헤엄치는 모습이 많은 죽은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는 듯하다. 길 중앙에는 자연에서 여러 가지 색상을 추출해 내는 모습을 실연한다


달의 신전(달의 피라미드) 달의 피라미드(Pyramid of the Moon)

'달의 피라미드'는 높이가 42m, 밑변이 가로 150m 세로 120m으로 테오티와칸에서 두번째로 높은 건축물이다. 태양의 피라미드보다 계단 수는 적지만 경사가 급해 오르는데 더 힘이든다. 달의 피라미드는 실제 태야의 피라미드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여 두 피라미드의 정상 높이는 같은 위치에 있다고 한다.


달의 신전(달의 피라미드)을 가다가 만난 고등학생들

달의 신전(달의 피라미드) -

  달의 피라미드(높이가 42m, 밑변이 150mX120m)는 태양의 피라미드 보다 규모와 계단 수는 적지만, 주 제단 역할을 했다. 달의 신전은 북쪽을 향해, 태양의 신전은 동쪽으로 17도 틀어져 있는데, 하늘의 별자리를 보기 위해서라고 한다. 대부분 달의 신전도 오르고 전망을 바라보고  계단 아래에서 박수를 치니, 다양한 각도로 꺾여 되돌아 나오는 공명현상이 신기하다.

달의 신전에서 내려다본 사자의길

관광온이들과 인정샷을

달의 피라미드(신전) (Piramide De La Luna) 위에서 찍은 사자의길

높이 46m의 피라밋으로 퀘잘 파파로틀 (QUETZAL PAPALOTL 나베궁전)과 재규어가 다수 조각된 재규어 궁전이 있다. 350년경에 지어진 달의 피라미드는 조금 솟아오른 땅 위에 세워져 있어 실제 크기는 태양의 피라미드 보다는 작지만 정상의 높이는 거의 같다. 달의 피라미드에 오르는 길은 태양의 피라미드보다는 수월하다. 과거 달의 피라미드의 정상에는 무게가 20t이 넘는 대형 조각상이 있었다고 한다. 중요한 종교 의례가 이 피라미드를 중심으로 행해졌다


복원 중인 왕궁 터와 재규어 신전 등

올라가는길이 경사가 심해 여간조심해서는 위험하다

달의 신전을 향해 기를 받고

달의 신전앞에서

자멀리 태양의 신전이



태양과 달의 신전 이모저모

사자의 길을 달의 신전에서 본모양



석양앞에서본 신전들



달의 신전

복원중인 신전

복원중인 신전

기념품가계


순찰중인 기마병 순경들

점심식당에서 멕시코 음악을

멕시코 전통적   모자를 쓰고 인정샷을

식당에서의 민속공원






다음4편을 기대해도 됩니다. 멕시코 칸군으로 갑니다.









2019.3.19~2019.4.9 22일간의 중남미 여행기 2편

멕시코시티 소깔로광장,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템플로 마요르 유적, 아즈택 문명 등

멕시코 가이드  김민정

중남미 여행 두번째날 미국을 출발하여 멕시코시티로 이동 시내관광을 지금부터 해보자


소깔로광장


원래 멕시코 시티는 옛날에는 호수였고, 소깔로 광장만 작게 돌출한 육지였는데 스페인이 멕시코를 점령한 후 이곳을 매립하여 도시를 건설하였다. '기반석'이라는 뜻의 소깔로는 사방 240m의 넓은 광장으로 1520년에 꼬르떼스가 만들었다.

광장 주변의 파괴된 아스떼까 건물에서 가져온 돌로 포장을 하였다, 원래 이름은 Plaza Real였으나

  1843년 Santa Anna대통령이 독립기념탑의 기반석을 놓으면서 이름을 소깔로로 바꾸었다.

사방이 각각240m나 되는 이광장은 북쪽에 대성당동쪽에 국립궁전, 남쪽에 연방정부청사가 자리잡고있는 스페인 식민시대의 전형적인 도심구조를 보여준다 소깔로 광장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넓은 광장(사실 세계에서 가장 큰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보다 조금 작을 뿐이다)으로, 중앙에는 멕시코 국기가 휘날리고, Cathedral Metropolitana(성당)과, Palacio Nacioal(궁전)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미국 LA공항에서 멕시코로가기위해

미국 LA공항에서 멕시코로가기위해

비행기 안에서

LA 공항 할주로

LA 상공에서

멕시코 진입

하늘에서본 멕시코 시티



멕시코시티 공항

멕시코시티 가이드 김민정

선인장들이 멕시코를 대표하고

이선인장으로 실을 뽑아 옷을 만들고 밧줄을 만들고 상품을판다.

선인장의 꽃 같았다.

시내 성당

성당앞에 운석같은 돌이

뒤쪽에서본 대성당

소깔로 광장에 있는 대성당

소깔로 광장에 있는 대성당

템플로 마요르(Templo Mayor)

템플로 마요르(Templo Mayor) 모형도

소깔로 광장에 있는 대성당 바로 옆에 있는 아즈텍 최후의 문명. 도시 한가운데 돌로 이뤄진
신전으로 15C 아즈텍이 건설한 이 위대한  사원은 떼노츠띠뜰란의 중심부에 있었다. 사원건
물은 스페인이 아즈텍의 수도를 정복한 이후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아즈텍 인디오들에 의해 14 - 15세기에 걸쳐 세워진

템플로 마요르(Templo Mayor)발굴 현장
스페인이 통치할 때 인디오들의 주된 건축물을 모두 땅 속에 묻어버렸다.
그 위에 스페인 방식의 건물을 지어버린 것이다.
멕시코시티의 소칼로 광장 에서 1979년 수로 공사중 땅 속에서 8톤 무게의 석관이
발견되면서 알려진 곳으로 1984년 일반에 공개되었다. 스페인 침략으로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아스떼까 시대의 유적으로 떼오치뜰란의 본전의 자리로 추측 되는곳이다

템플로 마요르(Templo Mayor)


템플로 마요르(Templo Mayor) 를 설명하는 김민정가이드

템플로 마요르(Templo Mayor)

아즈텍 인디오들의 의해 14- 15세기에 걸쳐 세워진 템플로 마요르 발굴현장, 스페인이 통치할때 인디오들의 주된 건축물들을 모두 땅속에 묻어 버렸다. 그 위에 스페인 방식의 건물을 지어 버린것이다. 멕시코시티서 소깔로광장에서 1979년 수로 공사중 땅속에서 8톤 무게의 석관이 발견 되면서 알려진 곳으로 1984년 일반에게 공개 되었다. 스페인의 침략으로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아스떼카 시대의 유적으로 떼오치뜰란의 본전의 자리로 추측 되는것이다

템플로 마요르(Templo Mayor)

소칼로 광장 템플로 마요르 유적-

소칼로의 뜻은 배꼽을 의미하여, 시내의 중심 광장임을 말한다. 광장 옆에 있는 템플로 마요르 유적지를 먼저 관광한다. 에스파니어로 위대한 사원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멕시코시티의 대표 유적지이다. 건물이 붕괴되어 하수도와 상수도 공사 중에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아스텍 시대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의 대 신전 기초 부분으로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소깔로 광장에 있는 대성당은 1570년부터 1620년에 걸쳐 건립된 성당으로 이곳은 아즈텍인의 희생된 해골이 묻혔던 장소라고 한다. 대성당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교회로 라틴아메리카 대주교 교구 대 성당이다. 3세기에 걸쳐 지여졌기 때문에 여러가지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소깔로 광장에 있는 대성당

국립예술원 궁전

국립예술원 궁전 (Palacio de Bellas Artes)

이태리 칼라라 지역 흰 대리석으로 외관을 장식한 콘서트 홀 건물로 박물관과 극장 시설을 유치하고있다. 예술 궁전으로 칭할 수 있는 이곳은 1910년 멕시코 독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1904년 부터 건축을 시작했다. 박물관의 2층,3층의 고전, 현대식 벽화는 멕시코의 유명한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에 의해 주도된 것이다.

국립예술원 궁전 (Palacio de Bellas Artes)

대성당 (Catedral Metropolitana) 

 소깔로 광장에 있는 대성당은 멕시코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건축물중 하나이다. 300여년에 걸쳐 완공됐는데 이 자리는 본래 멕시코인들이 인신공양한 해골들을 모아두던 곳이었다. 본 건물은 1533년 완공됐으나 17세기 들어 남쪽부분이 바로크 양식으로, 북쪽부분이 네오클래식 양식으로 확장돼 웅장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모습이 하모니를 이루었다. 대

성당에 있는 다섯개의 통로는 다소 야해보이는 형상과, 정교한 조판으로 장식되어 있으며바닥은 대리석이 깔려있다. 이 성당은 맥시코 사람들의 종교에 대한 믿음과, 신앙심을 잘 나태내 주고 있다

멕시코의 중앙광장으로 약 17,500평방 미터 넓이로 중요한 국가행사가 이곳에서 대부분 행해지며 아즈텍 시대에는 대신전이 있었고 정치, 종교의 중심지였다.

대통령궁 (현재는 정부 종합청사)이 있는데 이곳엔 1530년까지 아즈택 왕궁터였던 곳에 이를 허물고 1531년도부터 건립하였다.

 대통령궁안 복도에는 유명한 멕시코의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들로 장식되어 있다. 옛 인디오 아즈텍인들의 착취와 고통받는 모습들이 그려져 있는데, 1920년대부터 그리기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디에고 리베라가 1957년도에 사망하게 된다.

'기반석'이라는 뜻의 소깔로는 사방 240m의 넓은 광장으로 1520년에 꼬르떼스가 만들었다. 광장 주변의 파괴된 아스떼까 건물에서 가져온 돌로 포장을 하였고, 원래 이름은 Plaza Real였으나 1843년 Santa Anna대통령이 독립기념탑의 기반석을 놓으면서 이름을 소깔로로 바꾸었다. 소깔로 광장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넓은 광장(사실 세계에서 가장 큰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보다 조금 작을 뿐이다)으로, 중앙에는 멕시코 국기가 휘날리고, 북쪽에Cathedral Metropolitana(성당)와, 동쪽에 Palacio Nacioal(독립궁전)이, 남쪽에 시청사가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광장 주위에는 역사적인 건축물 외에도 공공건물, 레스토랑, 호텔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마제스틱 호텔에서는 소깔로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Cathedral Metropolitana는 라틴 아메리카의 유명한 성당 건축물 중 하나이고, Palacio Nacional에서는 멕시코 역사를 보여주는 Diego Rivera의 벽화들을 감상할 수 있다.

국립궁전 대통령궁

국립궁전 대통령궁, 1562년에는 스페인 총독의 거주지였는데 1927년에는 재 설계되어 3층이 추가되었다 이후부터 대통령실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중요한 대통령의 연설은 이건물의 발코니에서 이루어진다.

18 이 도시전체 지하에는 5000년 전에 아즈택 문화유적이 많이 묻혀 있다. 발굴된 문화유적지는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데, 이 광장 중앙에 초대형 멕시코 국기가 계양되어 펄럭이고 있었다.

 대통령궁안 복도에는 유명한 멕시코의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들로 장식되어 있다. 옛 인디오 아즈텍인들의 착취와 고통받는 모습들이 그려져 있는데, 1920년대부터 그리기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디에고 리베라가 1957년도에 사망하게 된다.

Epic of the Mexican People-Mexico Today and Tomorrow,1934-1934, National Palace


▲ Man, Controller of the Universe, 1934, Palace of the fine Arts, Mexico City

원래 Man at the Crossroads의 주제는 희망과 높은 비전을 가지고 새롭고 희망찬 미래를 선택해 가자는 것이다. 왼쪽으로는 엘리트 사회 -술마시고 카드놀이를 하며 인생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찰의 곤봉아래서 자선이 아니라 일을 달라는 실업자들의 무리가 있다. 그러나 오른쪽으로 가면 디에고 리베라가 원하는 평화의 비젼이 나타난다. 사회주의 아래 러시아 병사들과 미국의 흑인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농민들이 손을 잡고 굶주림과 전쟁 폭력이 없는 사회로 나아가자는 메세지를 담고 있었다.

 Man, Controller of the Universe, 1934, Palace of the fine Arts, Mexico City

십자가를 앞세우고 쳐들어오는 서구열강(스페인)과 원주민을 노예로 부리는 모습이 닮겨있다.

이광장에서 2007년 5월에는 수천명이 누드로 이 광장에 모여 미국인 사진가 스펜서투닉의 작품

모델이 되기도 했다.

광장 옆 골목의 풍경,

소깔로 광장 천사상  소칼로 광장 -

  소칼로 광장은 사방 240m의 큰 광장으로 1520년에 꼬르테스가 만들었다고 한다. 이 광장은 러시아의 모스크바 붉은 광장보다 조금 적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다고 한다. 중앙에는 대형 멕시코 국기가 휘날리고, 대통령 궁과 메트로폴리탄 대성당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현재 광장 안쪽에는 여러 용도로 사용되기 위한 구조물들(아이스링크장 등)이 수시로 설치되었다가 철거되곤 한다. 옛날에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구두닦이 의자가 옛날 우리네 삶을 회상해 보게 한다


이즈택문명의 전통복

4 소깔로 광장에 있는 대성당은 1570년부터 1620년에 걸쳐 건립된 성당으로 이곳은 아즈텍인의 희생된 해골이 묻혔던 장소라고 한다. 대성당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교회로 라틴아메리카 대주교 교구 대 성당이다. 3세기에 걸쳐 지여졌기 때문에 여러가지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대성당 (Catedral Metropolitana) 

 소깔로 광장에 있는 대성당은 멕시코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건축물중 하나이다. 300여년에 걸쳐 완공됐는데 이 자리는 본래 멕시코인들이 인신공양한 해골들을 모아두던 곳이었다. 본 건물은 1533년 완공됐으나 17세기 들어 남쪽부분이 바로크 양식으로, 북쪽부분이 네오클래식 양식으로 확장돼 웅장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모습이 하모니를 이루었다. 대

성당에 있는 다섯개의 통로는 다소 야해보이는 형상과, 정교한 조판으로 장식되어 있으며바닥은 대리석이 깔려있다. 이 성당은 맥시코 사람들의 종교에 대한 믿음과, 신앙심을 잘 나태내 주고 있다

금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제대다.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

  89%가 가톨릭 신자인 멕시코에서는 우리나라 명동 성당 같이 중심적 역할을 하는 제일 큰 규모의 성당이라고 한다. 본 미사가 이루어지는 대성당과 소성당으로 나누어져 있다. 건물 침하현상이 일어나고 있어, 베니스가 가라앉는 것보다 더 빨리 침하 된다고 우려가 크다. 이를 입증하듯 성당 내부에는 기울기를 측정하는 기기가 설치돼 있다. 또 눈길을 끄는 것은 제단을 비롯한 성화 등의 벽화가 금으로 도금되어 있는 것과 연주가 아직까지도 이루어지고 있는 대형 파이프 오르간을 본다.


대형의 파이프 오르간이다.

금으로 장식된 성당안

금으로 장식된 성당 제대



대성당전경



경호원 사진을 찍으니 좋다고 승락한다  같이도 찍고



검은 예수상 : 스페인 통치시절 예수상까지 바꾸면서  멕시코 인디안 원주민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신경을 쓴 흔적이다.



성당안에 소성당에서 현재 미사중이다

시간이 있었다면 미사를 보고 싶었는데  가이드가 빨리 오라고 재촉하여 사진만 찍고 돌아섰네


대성당 안에 소성당이 있다


동쪽에 독립궁전(Palacio Nacioal 스페인 식민지 시절에는 총통거주지)

멕시코메트로 폴리나 대성당

멕시코시티 야경


멕시코시티 야경




다음 3편에 계속됩니다 기대하여주세요


 


2019.3.19~2019.4.9 22일간의 중남미 여행기 1편

미국 로스엔젤레스

가이드 장경석이사(인터월드)  T 213-381-7800 HP 909-287-6692

미국 로스엔젤레스   2019.3.19 여행 1일째


진관광으로 시작된 중남미 여행기 

2019.3.19 ~2019.4.9 22일간의  중남미 여행을 일행21명과 더불어 어려운 고비도 있었지만 행복하고

즐겁게 큰무리없이 다녀왔다.

2019.3.19일 출발하여 2019.4.9일까지 총22일의 중남미여행 한진관광 예약센터 박예린씨의 안내를 받으며 수달전 계약을 완료하고 기다림과 설례임으로 출발하는 날자가 다가오자 긴여행을 어떻게

견딜수가 있을 까 하는 우려와 건강문제등 고산증에서도 견딜수 있을 까?

그러나 기우였다 걱정도 잠시 모든사람들이 다갈수 있는곳 나라고 못할수 있을까 큰맘으로 떠난 여행은 긴 비행기속에서 부터 지쳐가기 시작했다.


미국에 도착하여 장경석가이드를 미팅후 비행기속의 지루함도 어느듯 사라지고 관광이 시작된 로데오거리를 지작으로 중남미여행은 본격적으로  출발이다.

로데오거리, 허리웃거리, 차이니스극장, 한인타운, 비버리힐스 타운을 관광하니 밤이다.



인천공항에서 미국으로






출발전 인천공항

우리가 타고갈 대한항공 A 380 뱅기

인천공항에서 무료함을 달래고

아름다운 몸매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에 매료되어

지긋이 눈감고 연주하는 아가씨에 맘을 빼기고


3사람의 화모니가 아직도 귀에 맴돈다.

역시 한국은 아이티 강국

미국LA공항에서

금강산도 식후경

LA 시내모습

비버리힐스 가는길

비버리 힐스 입구


비버리힐스 입구 선인장으로 가꾸고




인정샷도 날리고

공원앞에서

수백년된 나무가 이체롭다

힘들어 하는 조각품을 어루만지고

로데오 거리로 가는길

로데오거리 아가씨들



로데오거리 이모저모







헐리웃거리를 만나서


사진도 찍어보고

여기서 킹콩도 만나고

미남배우들도 줄줄이 만나고

인기 배우와 같이 사진도 찍어보고



영화 속 캐릭터 분장을 한 사람들이 사진을 함께 찍고는 머니를 받는다.
여행에서의 만족은 기대에  반 비레하고 그 희소성에 비례한다 즉 기대를 많이 할수록 실망하고 희소성이 높을수록 만족도는 높아진다.

영화의 한장면같이

한국배우 이병현도 있고


 미키마우스 이후 40년 만에…명예의 거리 입성한 '미니마우스'

디즈니의 대표 캐릭터 미키마우스의 여자친구인 미니마우스가 90년 만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Hollywood Walk of Fame)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미니마우스가 1928년 미키 마우스와 함께 데뷔한 지 90년 만이라고 합니다. 미니 마우스는 1978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미키 마우스 명판이 새겨질 때 빠졌는데요. 이후 40년간 70편 이상의 애니메이션에 더 등장하고 나서야 2천627번째 스타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미키 마우스, 도날드덕, 팅커벨, 백설공주 등에 이어 디즈니 캐릭터로는 일곱 번째. 기뻐하는 미니마우스의 모습을 사진으로 확인해보시죠


맨즈 차이니즈 극장이다
현대적인 건물 사이에 양쪽 처마끝이 하늘로 솟아 춤을 추는듯하고 입구 건물엔 사자, 용으로 장식한 중국식의 향기가 배어 있는 듯 하다.1900년대 초반만 해도 대부분  이곳에서 개봉 시사회 하게 되어 더욱 명소가 되었는데 허리우드의 명사들은 고향과도 같을 것이다. 거리에서 유명 배우들을 볼 수는 없었다.




 맨즈 차이니즈 극장앞 거리풍경




죤웨인의 프린팅(1907.5.26~1979.6.11) 허지만 건물 보다도 이곳이 관광객들의 명물이 된 것은 건물 앞 바닥에 유명 배우나 감독들의 손바닥과 발 바닥이 남은 흔적 때문일 것이다.
1927년 5월 17일 노마 텔머지와 메리 피그포드, 더글러스 페어 뱅크스 시니어를 초대해 정식 행사를 처음 시작 했는데 1927년 맨즈 차이니즈 극장 개관식 전날 배우가 넘어지면서 찍은 손도장이 유래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졌다고...죤웨인의 손과 발은 유난히 적었다.



바로 극장 앞을 가로지르는 500여미터 블르버드를 따라가면 또 다른 허리우드의 보석 같은 별들을 만날수가있다.


멋진 작품 눈으로봐도 신기하다 얼굴이 정말 똑같다.

 스타 별들의 고향


마이클 잭슨(1958.8.29~2009.6.25)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별


마를린몬로의 모습


마를린몬로와 함께


영화 속 캐릭터 분장을 한  사람들이 사진을 함께 찍고는 머니를 받는다. 여행에서의 만족은 기대에 
반 비레하고 그 희소성에 비례한다 즉 기대를 많이 할수록 실망하고 희소성이  높을수록 만족도는 높아진다.

거리의 악사들 어디가나 많은 이들이 아름음악을 연주하고

스타의 고장 답게 밀납인형도 진짜같다.

무시무시한 킹콩도 있고

영화의 한장면

무하마드 알리 기념 앞에서 관광객과 함께

60년대 거장 대 음악가

신세대 로봇캅



LA 쇼핑 기념품가게


역시 멋진 사나이 꼭 진짜같다


22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찍은 사진을보니 6,850장 비디오가 240여장 되니 정신없이 여행을 다닌

흔적이 역역히 나타난다. 원래 패키지 여행은 짦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여주는 관광이기 때문에

개별여행보다는 많은 것을보고 비용도 적게 드는 편이다. 나이든 우리들이 많이 선택하기도 하고

편집하기전 여기 지난 추억들의 개별사진을 미리보니사진이 많아 한번보는데만 일주일이상 걸리니 작업하는 데도 몇달은 소요될것같다.



다음 2편을 기대해본다.

 

 










중남미 여행기3편

2019.3.19~2019.4.9  22일

볼리비아 우유니부터 ~ 브라질 리우까지


볼리비아 우유니 - 가이드 박경숙사장















































볼리비아 라파즈 - 가이드 이안호 대타








































칠레 산티아고 - 가이드 홍동식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 가이드 하주영




















브라질 - 가이드 정희라


















중남미 여행기 2편


페루 파라카스에서


페루 파라카스  - 가이드 박경숙사장







페루 이까  - 가이드 박경숙사장












페루 나스까  - 가이드 박경숙사장









페루 쿠스코  - 가이드 박경숙사장












페루 우르밤마  - 가이드 박경숙사장







페루 마추비츄  - 가이드 박경숙사장













































































중남미 여행기

2019.3.19 ~2019.4.9 22일간의  중남미 여행을 일행21명과 큰무리없이 다녀왔다.

중간중간 애로사항은 한두건 있었지만 그래도 모두 건강하게 다녀온데 대하여 모두에게 감사를 드린다.

22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찍은 사진을보니 6,850장 비디오가 240여장 되니 정신없이 여행을 다닌

흔적이 역역히 나타난다. 원래 패키지 여행은 짦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여주는 관광이기 때문에

개별여행보다는 많은 것을보고 비용도 적게 드는 편이다. 나이든 우리들이 많이 선택하기도 하고

편집하기전 여기 지난 추억들의 개별사진을 미리 올려 드리니 필요하신분은 다운받으시기 바랍니다.

사진이 많아 한번보는데만 일주일이상 걸리니 작업하는 데도 몇달은 소요될예정입니다.


미국에서 페루 리마까지


ㅇ 미국 로스엔젤레스 - 가이드 장경식



ㅇ 멕시코시티 - 가이드 김민정






멕시코 칸군 - 가이드 김국현































ㅇ 쿠바 하바나 - 가이드 미아











































ㅇ 페루 리마 - 가이드 박경숙 사장














































1부 끝

2018.11.14  대마도 트래킹 3편 사진

다볼산악회 대마도 여행기

일시:2018.11.14~11.15

여행: 사진 1편

서울 ~부산항~오션플라워~수선사~토스이기념관~이즈하라시내~팔번궁신사~아라아케산(유명산)

 사진 2편

미우다해수욕장~슈시산림욕장

 사진3편

가네이시성터~덕혜옹주비~쓰시마 민속박물관~예보시다 전망대(한국전망대)~와타즈미신사~만세키바리다리~티아라쇼핑센터~이즈하라오션~부산항~서울




































































































2018.11.14  대마도 트래킹 2편 사진

다볼산악회 대마도 여행기

일시:2018.11.14~11.15

여행: 사진 1편

서울 ~부산항~오션플라워~수선사~토스이기념관~이즈하라시내~팔번궁신사~아라아케산(유명산)

 사진 2편

미우다해수욕장~슈시산림욕장

 사진3편

가네이시성터~덕혜옹주비~쓰시마 민속박물관~예보시다 전망대(한국전망대)~와타즈미신사~만세키바리다리~티아라쇼핑센터~이즈하라오션~부산항~서울
































2018.11.14  대마 트래킹 1편 사진

다볼산악회 대마도 여행기

일시:2018.11.14~11.15

여행: 사진 1편

서울 ~부산항~오션플라워~수선사~토스이기념관~이즈하라시내~팔번궁신사~아라아케산(유명산)

 사진 2편

미우다해수욕장~슈시산림욕장

 사진3편

가네이시성터~덕혜옹주비~쓰시마 민속박물관~예보시다 전망대(한국전망대)~와타즈미신사~만세키바리다리~티아라쇼핑센터~이즈하라오션~부산항~서울



























 


보물섬투어로 시작한 북유럽여행기


2018.7.02 18편 러시아 모스코바

모스크바러시아의 수도이다. 러시아 최대의 도시이자 유럽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이며, 세계에서는 4번째로 큰 도시이다. 14세기에서 18세기 초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였고. 혁명 이후 1918년 러시아의 수도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 곳으로 옮겨왔고 1922년 소련의 탄생과 함께 소련의 수도가 되었다.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의 수도가 되었다. 냉전 시대에는 세계 공산당의 본부이기도 하였던 모스크바는 1980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시가의 중심에는 모스크바강 좌안에 크렘린이 있고 또한 그 주변에는 붉은 광장과 레닌 묘, 바실리 사원 등이 있어 모스크바의 상징적 풍경을 보이고 있다. 거기서 사방으로 방사상(放射狀) 도로가 뻗고, 시의 외주(外周)를 환상(環狀) 도로가 둘러싸고 있으며, 그 밖은 삼림공원으로 되어 있다.[2] 대표적 건물은 크렘린이다. 11월에서 2월까지의 겨울에는 태양이 오전 8시 30분이 넘어야 뜨고 (12월 28, 29, 30일에는 오전 9시에 뜬다.) 오후 4시만 되어도 진다. (여름에는 오전 4시 45분만 되어도 해가 뜨고 오후 10시가 넘어서도 해가 지지 않는다.)



면적은 1000만㎢,  인구는 1196만명이라고 하나 신고되지 않은 인구는 더 많을 것이라고 하며, 

 국민소득3만불이나 러시아의 타 지역은 4~5천불로 빈부의 차이가 크다.


러시아는 인구 1억5천만명, 면적은 지구 표면의 1/7로,  177만 5천 4백㎢, 우리나라의 78배, 동서간 거리가 9,600㎞로  러시아 내에서도 시차가 11시간 발생하는 나라,  그래서 하루 종일 해가 지지않는 나라

러시아는 겨울에는 해가 빨리 지고,  여름에는 해가 늦게 져 저녁7~8시가 우리나라 3~4시 정도로 밝고,

밤 10시까지도 아직 어슴프레하고, 새벽 4시면 환하게 밝다.


러시아는 국목이 자작나무 로, 자작나무가 하얗고 길며 윗부분의 잎사귀가 휘날린다고 하여  러시아의 아가씨를 상징한다고 하며,  자작나무 껍질에 그림을 그리면 변질이 되지 않아  자작나무는 살아서 천년 죽어서도 천년을 간다고 한다.


아르바트 거리의 붉은 광장은 빨간 색이 러시아의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아름다운 광장이란 뜻이다.  모스코바 최대의 관광 명소 크레믈린 궁은  현재는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하고 있으며,  크레믈이라고 하며 “성벽”이란 뜻이라고 한다. 크레뮬 성곽을 이반 3세가 빨간 벽돌로 바꾸어 완성했다


붉은 광장 입구 부활의 문 - 붉은 광장으로 들어오려면 이 문을 통해야한다


부활의 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왼쪽에 카잔 성모성당 이 보인다

클레물린 궁 앞에 있는 철모와 총, 군인 만토가 놓여있는 세계2차대전으로 전사한 수많은 무명용사의 넋을 기리는  전몰장병 위령비,  꺼지지않는 불과 그 불을 지키는 경비병,   크래믈린궁의 성벽과 성벽안의 노란색 건물이 병기고 건물 크래믈린 궁 안의 병기고 건물에는 조국전쟁에서   나폴레옹군으로 부터 빼앗은 875문의 고대 대포가 전시되어 있다.


 

붉은 광장, 크레믈린 궁 (붉은 성벽 안에 크레믈린 궁의 지붕이 살짝 보인다.) 

붉은 광장과 붉은 광장 안의 스파스카야  시계탑


레닌의 묘 - .

붉은 광장 안의 역사 박물관


꼭대기에 별이 있는 탑 트로이츠카야탑(일명 삼위일체탑) 이 탑의 꼭데기에 보이는 별의 크기가 보기에는 작아 보여도 지름이 3.75m이고 무게가 1톤이나 되는 것이라 바람이 불면 떨어질까봐  별이 바람의 방향에 따라 돌아가게 제작되었다고 한다. 

 


모스코바 국립대학 - 스타린 양식 중 제일 큰 건물(로벨상 12개- 흉상 12개)스탈린 건축양식 - 지붕이 뾰족한 건물 지붕 꼭대기에 머리 둘 달린 독수리 대신 별이 달려있다


역사 박물관 앞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 최고의 명장이자 국가영웅인 게오르기 주코프 기마상이  이무기를 밟고 있다.

성바실리성당 - 아홉 개의 돔을 가진 불균형의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건축물

클레믈린 궁안의 대통령이 집무하는 대통령궁 레닌과 스타린의 집무실- 현재는 푸틴의 집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클레믈린 궁안의 상원의사당 - 오른쪽 노란 집

 

모스코바 최대의 굼 백화점

크래믈린 궁 안의 황제의 대포(The Tsar Cannon) - 세계에서 제일 큰 대포  무게 38톤, 길이 5.34m, 구경 890mm, 외경 1200m, 1586년에 제작됨   이 종과 대포는 한 번도 울리지도 쏘지도 않았다고 한다.

 


크레믈린궁 안에 있는 성당들  - 사원광장(소보르나야 광장)에는 여러 사원들이 들어서 있는데, 사원 내부에 들어 갈 때는 남자는 모자를 벗어야 하며 사진찰영은 금지되어 있고, 러시아정교는 예배형식이 다르고, 의자없이 서서 미사를 보고 성호도 긋는 방향도 다르다고 한다.


대성당 광장(소보르나냐플로시차트) 주변에는 3개의 웅장한 대성당이 서 있는데, 이들은 15세기말부터 16세기초에 절정을 이루었던 러시아 교회 건축양식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중 흰 돌로 지은 성모승천 대성당(우스펜스키소보르)은 그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1475~79년 이탈리아-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다.

성모수태고지성당(블라고베시첸스키성당)- 이탈리아 건축가가 건축

 황가의  가족성당으로 이반4세가 1489년에 완공했으며, 러시아 최고의 화가가 그린 원형 그대로의 아름다운벽화(니콘화)가 있는 성당으로  바닥에 보석이 깔려 있다고 한다.

미카엘천사성당(아르힝겔리스키사원) - 러시아 건축가가 건축했다

우스펜스키 대성당(성모승천 대성당) - 러시아 국보 1호

5개의 황금색 돔형 지붕을 자랑하는 성당으로 러시아 정교의 중심이 되는 사원이자  역대 황제의 제관식이나 총주교의 임명식이 거행되었던 사원으로 돔형 지붕은 교황의 정령을 상징하며 다섯개의 돔중 가운데 큰 돔은 예수그리스도,   둘레의 4개의 작은 돔은 4명의 사도를 나타내고  벽과 지붕에 장식된 성화 작품은 1,000여명의 승려들이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성모승천 대성당(우스펜스키소보르)

광장 건너편에 있는 성모영보 대성당(블라고베시첸스키소보르)은 1484~89년 프스코프 출신의 장인들이 만들었으며, 1547년 불에 탔으나 1562~64년 재건되었다. 1505~08년 재건된 대천사 대성당은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건설되기 전까지 많은 모스크바의 공후(公侯)와 러시아 황제들의 영묘가 모셔졌던 곳이다.

대천사사원- 대천사사원은 러시아군의 수호천사인 미가엘 천사장을 위해만든것이고

 모스코바공곡의 대공및 봉건제후들 그리고 초기 러시아제국 황제들이 무덤으로 이용되었음.

이 성당안 아래사진들 < 성당안은 촬영금지구역이라 중요한 사진 몇장을 살짝 찍었다>. 

대천사사원 황족묘지 성당안 :대천사사원이 류릭왕조와 로마노프 왕조의 무덤으로 이용되기 시작한것은 이반 1세가 처음 석조사원을 건축하고 사원에 장사된 1340년부터임. 성당 안에서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몇장만

십자가에 달린예수  이성화는 1681년 황궁화가 밀류턴에 의해 제작되었고 성화벽 종교 명절단에 자리잡고있음. 대천사사원 성화벽 성화들중 유일하게 화가의 서명이 들어있는작품

축복받은 하늘 성모화는 1678-1679년에 제작된것으로 바실리 1세의 아내가 모스코바로 가져왔다고 함.

이성화에 묘사된 성모는 보통 서유럽 성화들에서 볼수있는 모습을하고 있음.

성화벽 <미가엘 천사장과 천사들의 행전>

성테오로드 이성화는 1680년 제작되었고 성화벽하단에 있음. 이성화에 묘사된 순교자 테오드르는 갑옷을 입고 왼손에 찬과 방패를 들고 오른손에는 십자가를 들고있음.

아기예수의 정결예식 이성화는 종교명절을 주제로한 성화벽에 자리잡고 있고 경건한 시므온과 안나가 아기예수를 만나는 신약성경의 에피소드를 묘사하고있음. 1680-1681년에 제작됨.

우스튜그의 성모수태고지 : 이성화는 16세기 이반 뇌제의 명으로 제작되었는데 12세기 노브고로드성화 제작기법을 이용하고 있음. 이 성화의 특징은 성모의 가슴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묘사되어 있다는 것임.

우스펜스키 대성당(성모승천 대성당)앞에서


1679~1681년에 지어진 베르호스빠스키성당의 지붕

 러시아 정교회의 십자가의 모양이 지금의 교회의 십자가와 틀린 걸 볼 수 있다

12사도 성당

황제의 종 바로 뒤에 있는 이반 대제의 종루  적의 침략을 살피기위해 높이를 81m로 만들었으며,

적이 침입하면 21개의 종이 모두 울리게끔 되어 있고, 이 당시 모스크바에는 이 종루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게 하였다고 한다.


광장 바로 바깥쪽에는 백색의 화려한 이반 3세 종탑이 높이 솟아 있다.

이 탑은 16세기에 건설되었으나 1812년 훼손되어 몇 년 뒤 복구되었다. 종탑 아래에는 1733~35년에 주조된 거대한 차르 종(차르 콜로콜)이 있는데 한번도 울린 적이 없다. 종 가까이에 1586년에 만든 차르 대포(차르푸슈카)가 있고 그 옆에는 17세기 중엽에 지은 12사도 대성당(소보르드베나트차티아포스톨로프)과 총대주교 관저가 있다. 대성당 광장 서쪽에는 수세기에 걸쳐 지어진 궁전들이 있다. 파세츠 궁전(그라노비타야팔라타)은 1487~91년, 그뒤에 있는 테렘 궁전은 1635~36년에 세워졌다.

황제의 종 - 세계에서 제일 큰 종 200톤  한 귀퉁이가 깨졌는데 깨진 조각만도 11톤 깨진 조각을 만지면 소원 성취 한다고 하여 많이 만져 반질반질 윤이 났다  우리도 만지며 각자 나름대로의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황제의 종

테렘 궁전 안에는 나사로 부활교회(보스크레세니예라자랴) 를 비롯해 이 궁전이 세워지기 이전인 1393년 무렵부터 지어진 오래된 교회들이 있다. 파세츠 궁전과 테렘 궁전 모두 1838~49년 황실 거처로 지은 크렘린 대(大)궁전의 일부가 되었다. 1844~51년에 세운 무기 궁전(오루제이나야팔라타)은 크렘린 대궁전과 연결되어 있으며 지금은 차르 시대의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무기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크렘린의 북동쪽 벽을 따라 무기고(1702~36), 옛 의사당 건물(1776~88), 적군(赤軍) 사관학교(1932~34), 의회(1960~61)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크렘린의 북동쪽 벽을 따라 무기고(1702~36), 옛 의사당 건물(1776~88), 적군(赤軍) 사관학교(1932~34), 의회(1960~61)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왕궁 경비들과



모스크바 시에서 벌이는 모든 의식의 중심지인 붉은 광장(크라스나야플로스차트)은 크렘린 동쪽 벽을 따라 펼쳐져 있으며 레닌 영묘는 벽 바로 밑에 있다. 붉은광장 남단에 있는 대도(代禱) 교회(포크로프스키소보르)는 복자 성바실리우스 대성당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독특하고 웅장한 건축양식을 보이는 이 대성당은 이반 4세가 카잔과 아스트라한에 있던 타타르족(몽골족)들을 물리친 것을 기념해 1554~60년에 세웠다.

붉은광장을 사이에 두고 크렘린 맞은편에 국영백화점(GUM)이 있고 광장 북단에는 국립역사박물관(1875~83)이 있다.

성바실리우스 대성당으로


붉은광장을 사이에 두고 크렘린 맞은편에 국영백화점(GUM)이 있고 광장 북단에는 국립역사박물관(1875~83)이 있다.




국립역사박물관(1875~83)


붉은광장에서

노란색이 굼 백화점 물건값이 최고 비싼곳

요새화된 크렘린은 이 시의 중심이자 역사적 구심점이며 러시아와 소련의 힘과 권위의 상징이었다.

크렘린의 총안이 뚫린 붉은 벽돌벽과 20개의 탑은 15세기말에 세워졌다. 그 가운데 '붉은광장'으로 이어지는 스파스스카야(구세주) 탑은 주요탑 중의 하나로, 1491년 페트로 솔라리오가 건축했는데 그는 크렘린의 주요탑 대부분을 설계했다. 붉은광장 앞에 있는 또 하나의 탑인 상트니콜스카야 탑은 1491년에 세워졌으며 1806년에 재건되었다. 또다른 2개의 주요관문탑은 서쪽 벽에 있다.

크렘린 성벽 안에는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교회와 궁전들이 있다.


성바실리우스 대성당으로

성바실리우스 대성당의 아름다움

성바실리우스 대성당의 아름다움

성바실리우스 대성당의 아름다움

붉은 광장에서

















예수승천 교회(1532)는 뛰어난 건축물 중 하나로 탑이 우뚝 솟아 있다. 카잔 교회와 문루는 17세기 후반에 세워졌다.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공원에는 각지에서 수집해온 초기 러시아 양식의 목재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 가까운 디아코보 마을에는 사치스럽게 장식된 1557년의 세례자 요한 교회가 있다. 모스크바 환상도로 안쪽에는 가장 최근에 개발된 주택지 너머로 숲과 공터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으며, 1960년 모스크바의 경계확장에 따라 시 안으로 흡수된 옛 공업 위성도시들과 주택단지들이 있다.




러시아는 이 없고, 해발 110m인 레닌언덕(참새언덕)이 가장 높은 곳으로 이곳이 모스코바를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

붉은광장에서 월드컵경기 응원온 여행객과 함께

붉은광장에서 월드컵경기 응원온 여행객과 함께

붉은광장에서 월드컵경기 응원온 여행객과 함께

붉은광장에서 월드컵경기 응원온 여행객과 함께

붉은광장에서 월드컵경기 응원온 여행객과 함께


성바실리우스 대성당의 아름다운 야경

성바실리우스 대성당의 아름다운 야경





모스코바야경


성바실리우스 대성당의 아름다운 야경

모스코바야경

모스코바야경


여행을 마치고 잠시 여유시간에 러시아 커피를 시켜 잠깐의 행복을 만끽했다.


모스코바 공항에서 대한항공을 타고 공항을 떠나고 있다.

 하늘에서본 모스코바.

하늘에서본 모스코바.

2018.6.22~7.3 (10박 12일)

10박 12일의 북유럽여행이 이것으로 종료된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여행이었지만 우리는 많은 추억을 남기고 세계의 문화를 배우고 익히며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다. 앞으로도 시간이된다면 더 많은 여행으로 견문을 넓히고 남은여생을 살면서

더욱 보탬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같이간 일행 12명 모두에게 행운과 행복이 항상 있기를 기도해본다

2018.7.19

글쓴이 차세대








보물섬투어로 시작한 북유럽여행기


2018.7.01  17편 러시아 상트페테부르크 넵스킨대로 황금첨탑


넵스킨대로

넵스킨대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이 되는 메인대로로씨궁전 광장에서 시작하여 알랙산드르 넵스키 성당까지연결되는 최대의 번화 거리입니다

수많은 인파가 몰리는 인기 거리를 반영하듯 백화점 극장 레스토랑 호탤 등 뿐만 아니라 길거리의 예술가들가 화가등 다양한 문화인들을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중간에 카진 성당과 주요 관광지로 이동이 용이하며 네바강의 거리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네바강 유람선을 타기 위해이동 길가에는 자작나무 숲이 울창


고속도로 톨게이트

호텔에서 바라본 정교회

저녁을 먹고 시내 카페에서 맥주한잔



상트페테르부르크 배수진 가이드와 함께

호텔에서 바라본 야경

오늘하루 같이할 가이드 배수진


버스를타고 가며 찍은 시내


넵스킨대로 신호등이 공중에



지하철역


카잔성당

카잔성당

넵스킨대로

인공수로


개선문



운하에는 꽤 많은 유람선(遊覽船)들이 떠다닌다. 네프스키 대로 못지않게 페테르부르크 교통의 요지가 되고 있는 곳이 운하이다. 수많은 수로(水路)들로 이루어진 이 도시를 편하게 둘러보는 데는 유람선만한 게 없다. 페테르부르크를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코스로 자리 잡은 이유일 것이다. 유람선은 선실 외에도 선미(船尾) 부분에 의자가 놓여있으니 원하는 곳에 앉아 주변 경관을 눈에 담기만 하면 된다.

배가 출발하자마자 가이드의 설명이 시작된다. 페테르부르크란 도시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고통스런 역사이야기다. 황제 즉위 이전 유럽을 돌며 여러 나라에서 문화와 기술을 익힌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의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유럽을 향해 더 가까운 곳으로 옮기고 전 세계에 내세울만한 문화, 예술의 도시를 건설하고자 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도시가 페테르부르크이다. 1703년 표트르 대제에 의해 시작된 새 수도의 건설은 10년에 걸쳐 늪지대 위에 돌을 쌓아 올린다. 당시 이 아름다운 도시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도시 건설에 필요한 커다란 돌을 지참하는 것이 시민권을 부여 받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고 한다. 늪지데 도시를 만들었으니 그 공사가 순탄하게 진행되었을 리가 없다. 공사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고 한다. 그 시신들은 공사의 원활을 기한다는 명목으로 돌들과 함께 늪에 버려졌다. ‘북방의 베네치아’, ‘유럽을 향한 창’, ‘거룩한 베드로(표트르)의 도시등 수많은 수식어의 끝에 꼭 따라다니는 뼈 위에 세운 도시라는 불명예스런 오명(汚名)을 얻게 된 원인이다.

페테르부르크는 101개의 섬 위에 세워진 물의 도시이자 운하의 도시이다. 86개의 강과 운하, 101개의 섬이 365개의 다리(교외까지 포함하면 623)로 연결되어 있다. 운하와 강의 사이사이에 들어앉은 뭍에는 고풍스런 건축물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혁명의 혼란 속에서도 문화재는 물론이고 일반 건물에 이르기까지 페테르부르크 시대의 것을 그대로 보존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시 전체가 박물관인 듯한 느낌을 주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표트르대제와 예카테리나 2세를 거친 후 알렉산드르 1(1801~1825)가 다스리던 시기의 러시아는 유럽의 맹주로 떠오르게 된다. 당연히 건축 수요가 증가하게 되었고, 당시 전 유럽의 유명한 조각가와 건축가들이 페테르부르크로 몰려왔다. 그들의 참여로 유럽을 풍미하던 최고의 양식과 스타일로 변한 도시는 18세기 유럽의 초호화판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뾰쪽한 첨탑이 특징인 고딕양식(Gothic style)과 아케이드(arcade)에 반원형의 아치를 많이 사용한 로마네스크 양식(Romanesque style), 고딕양식의 구조에다 미적 요소를 가미한 르네상스양식Renaissance style), 그리고 르네상스양식이 진화한 바로크 양식(Baroque style) 등 중세유럽을 풍미했던 갖가지 건축기법들을 동원해 지은 옛 건물들이 줄줄이 늘어서있다. 하나같이 독특한 외형을 지닌 아름다운 건축물들이다.

운하의 둑을 따라 고풍스런 건축물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수백, 수천 개의 건물이 모두 저마다 개성과 특색이 있어 보이다. 운하 자체를 살아있는 야외 박물관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눈의 호사가 계속된다. 그래서 유람선 투어를 일러 페테르부르크 관광의 백미(白眉)라고 칭송하는가 보다.

주황색 건물은 파벨 1가 지은 미하일롭스키(Michailovska) 궁전이다. ‘예카테리나 여제표트르 3사이에서 태어난 황제인 파벨 1는 이 자리에 있던 엘리자베타 여제의 여름궁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예카테리나 여제의 권력에 대한 야망 탓에 파벨 1세는 42세의 나이가 되어서야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데, 5년 남짓한 통치기간 중 자신이 태어난 엘리자베타 여제의 여름궁전을 허물고 현재의 미하일롭스키 궁전을 건축했다. 그는 통치 5년 만에 귀족들의 궁정반란으로 살해된다. 그가 살해된 곳 역시 이곳이니 불운한 황제였던 파벨 1세의 생과 사의 역사가 이루어진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러시아 혁명 이후 기계공학대학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한때 기계공대궁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현재는 러시아 박물관 산하의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네바강에 가까워지자 왼편에 넓고 푸른 숲이 나타난다.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의 휴식처인 여름 정원이다. ‘표트르 대제가 살던 소박한 2층짜리 여름 궁전도 이 정원 안에 들어있다. 궁전 안의 실내 장식과 가구가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고 하니 시간이 날 경우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벽 하나를 가득 메울 만큼 커다란 시계도 보게 될 것이다. 아무튼 공원에는 250개나 되는 대리석 조각상(상당수는 그리스의 신화를 모티브)들과 가로수길, 그리고 연못이 조화롭게 잘 배열되어 있다.

네바강에 들어서자 반가운 풍경 하나가 시야(視野)에 잡힌다. ‘삼성기아자동차의 광고판이다. 가이드의 말로는 두 회사가 이루어낸 노력의 결과란다. 러시아의 경제가 어려웠을 당시 이곳 페테르부르크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어느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던 자리에 광고판을 내걸 수 있게 해주었단다. 그래 대한민국 만세다. 저런 기업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교역국에 자리 잡을 수 있었을 게다.

네바 강의 강폭이 넓어지는 곳에 이르면 건너편 저 멀리에 황금빛 첨탑이 나타난다.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 군대를 방어하기 위해 네바강 유역에 구축한 페트로 파블로스키 요새(要塞)’이다. 네바강의 하구 델타지대에 위치한 토끼섬에 지어진 요새로 1706년부터 약 35년이 걸려 완성되었다. 요새를 둘러싼 두꺼운 벽(높이 12미터, 4미터)에는 5개의 문이 만들어져 있다. 6개의 성채 가운데 네바 강으로 향한 나리시킨스키 성채에서는 매일 정오를 알리는 공포를 쏜다고 하니 참조한다. 그건 그렇고 요새가 만들어진 뒤 정작 스웨덴 군대는 단 한 번도 쳐들어온 적이 없었고, 이후 요새는 정치범수용소로 사용됐다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 고리키, 바쿠닌, 트로츠키 등이 이곳을 거쳐 가면서 이 요새는 러시아의 바스티유라는 별명이 붙었다. 감옥(監獄)으로 변한 요새의 첫 죄수는 아이러니하게도 표트르 대제의 아들 알렉세이 황태자였다. 죄명은 반역죄, 아버지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모의했다는 것이다. 표트르는 생존의 위협을 받으면서 황위에 올랐다. 외가는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리고 그는 군인으로 반생을 전장에서 보냈다. 강력한 군주(君主)였지만 대신 남을 잘 믿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전쟁보다 평화를 추구했던 황태자는 유약했다. 계속되는 아버지의 질책에 두려움을 느낀 아들은 결국 러시아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빈을 거쳐 나폴리까지 도망했지만 결국에는 러시아로 끌려올 수밖에 없었다. 표트르는 결국 황태자를 포기한다. 그리고 황제는 황태자를 반역죄로 가뒀다.

뾰쪽하게 솟아오른 황금빛 첨탑은 같은 이름(파블로프스크)의 성당이다.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와 바울을 기념하는 교회로 요새의 이름은 이 건축물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성당은 스위스인 건축가 도메니코 토레지니에 의해 1712년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1733년에 완성되었다. 그 후 종루에 피뢰침이 없어서 몇 번의 화재를 입었는데, 1756년에는 첨탑과 네덜란드 시계가 불타 버린 일도 있다. 1850년대에는 높이 121.8미터의 새로운 첨탑이 세워져 페테르부르크 최고의 건축물이 되었다. 20년이나 걸려서 만든 만큼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역대 로마노프 왕가의 황족들이 묻혀있다. ‘황제의 성당인 셈이다. 황제의 성당답게 넓은 공간에 충분한 빛을 받아들이며 지주, 벽기둥, 대리석으로 된 벽과 다양한 색채의 아치, 그리고 금박을 입힌 석고상과 갖가지 빛깔의 키르시탈 샹들리에 등 어느 것 하나 예술품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한다. 특히 이코노스타시스(iconostasis, 聖像 칸막이)는 떡갈나무를 조각하고 금박을 입혀 장엄함을 강조하고 있단다.

유람선은 토끼(자야치) 바실레오스트롭스키 섬을 이어주는 트로이츠키 다리를 통과한 후 조금 더 올라가다가 방향을 튼다. 더 이상은 볼만한 게 없다는 얘기일 것이다. ‘트로이츠키 다리1897-1903년에 프랑스의 에펠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구스타프 에펠(Alexandre Gustave Eiffel)’이다. 이 다리가 철제(鐵製) 다리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 다리는 페테르부르크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지난 2003년이 300주년이었다니 벌써 100년이 훨씬 넘은 셈이다.

트로이츠키 다리 근처에는 범선(帆船)이 한 척이 정박해 있다. ‘페트롭스키 호위함을 복제(複製)해 만든 것인데, 현재 수상 레스토랑인 '블라고다티(Благодать)'가 문을 열고 있단다. 가이드의 말로는 조금 더 가면 주요 역사유적 가운데 하나인 표트르 대제의 목조 오두막집이 있다고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최초로 지은(1703) 건물인데 표트르는 이 오두막에서 8년 동안을 살면서 수도 건설에 잠심몰두(潛心沒頭)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오두막에 전시된 소박한 거실과 침실, 서재와 식당, 그가 직접 만든 보트 등 유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만든단다. 마지막으로 가이드는 이 오두막이 덮개로 덮여있는데다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어 울타리 뒤에 있는 청동흉상에 주목하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는 주의사항까지 전해준다

높이 32m로스트랄 등대 (Rostal Column)’가 있는 바실레오스트롭스키 섬(Vasilievsky Island)‘, 로스트랄이란 라틴어로 뱃머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해전에서 승리를 기념하여 원주를 세우고 포획한 배의 뱃머리로 기둥을 장식하였던 것에서 그 이름이 유래 되었는데 러시아도 이를 모방하여 해전의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등대다. 러시아가 바이킹 왕국으로 명성을 떨치던 과거 스웨덴과의 해전시 침몰시킨 스웨덴 뱃머리를 잘라다가 등대에 붙여놓은 것이다. 이는 러시아의 국가적 자부심의 표증이자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던 바이킹 해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음을 기념하는 등대다. 등대를 둘러싼 공원과 바다가 만나는 이곳은 신혼부부들의 화보 촬영이나 관광객들 그리고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돌아오는 뱃머리에 서니 자연스레 우리의 한강과 비교가 된다. 네바강은 우리의 한강처럼 물이 많이 흐른다. 강폭도 무척 넓어서 건너편의 건축물들이 조그맣게 보일 정도이다.


네바강 유람선1시간 타고 옵션 50유로 







유람선 위에서



이삭성당을배경으로

성 이사악 성당(러시아어: Исаакиевский собор)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러시아 정교회성당으로 지어질 당시에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지어졌다. 높이 101.52m, 성당의 둥근 천장이 21.83m, 길이가 11.2m, 폭이 97.6m인 이 성당은 64~114톤에 이르는 72개의 거대한 원형의 돌들로 둘러싸고 있다. 1만 4천명을 수용할 수 있다. 원래 명칭은 ‘이사악키이예프스키 사보르’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이 아니라 달마티아의 성 이사악이라는 정교회 성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달마티아의 성 이사악의 축일은 5월 30일인데 바로 그 날이 표트르 대제의 생일이기 때문이다.[1] 웅장한 금빛의 둥근 지붕이 특징인 성 이사악 성당은 현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제정시대 교회의 막강한 권력을 상징하듯 높이도 고층빌딩만해서 먼 곳에서도 잘 보인다. 내부에는 중앙에 있는 카를 브리쵸프의 작품을 비롯하여 성경의 내용과 성인들을 묘사한 예술가들의 그림이 많이 그려져 있다. 그밖에도 수백점의 동상과 부조가 있다


성이삭성당(St. Isaac's Cathedral)

성이삭성당(St. Isaac's Cathedral)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성당  청동의 기마상 맞은편에 위치한 거대한 황금빛 돔은 성이삭의 날인 5월 30일에  태어난 표트르 대제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성 이삭  성당으로,  돔의 크기가 세계에서 세 번째 규모인 101.5m에 이르며 도시의 어느 곳에서도 눈에 쉽게 띄는 건축물이다.  길이 111.2m, 폭 97.6m로  총14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규모의 이 성당은 1818년 몽페란드에 의해 설계된 후 40년이 지나서야 완공되었다.  이 엄청난 공사에는 총40만 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성당을 장식하는 데에는 대리석과 반암, 벽옥 등 40여 가지가  넘는 다양한 석재가 사용되었고, 성당의 내부에는 성서의 내용과 성인을 묘사한 150점이 넘는 러시아 화가들의 회화와 조각품, 12000여개의 조각으로 만들어진 62개의 독특한 모자이크 프레스코화가 전시되어 있다 .  43m에 달하는 교회의 전망대에서는 페테르부르크의 아름다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전망대는 성당 내부로의 입장료와는 별개로 따로 입장권을 구입하여야 한다.


성이삭성당(St. Isaac's Cathedral)

대리석 기둥의 색이 붉은 것은 러시아산 대리석이라고 한다


성이삭성당(St. Isaac's Cathedral)

성 이삭성당의 건설하고 있는 모습의 사진



성이삭성당(St. Isaac's Cathedral)

이 곳의 중안 돔 위의 천정에는 평화의 상징 비둘기의 이콘화가 있었다 카톨릭에서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한다


중간 아치 위의 그리스도상을​ 이탈리아어로​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 세상의 구세주상이라고 한다.

 세계를 상징하는 공을 왼손에 받쳐들고 오른손은 치켜들어 축복을 내리는 모습이다.​  정교회뿐 아니라 르네상스 이래 유럽 전역에서 성화로 자주 써 온 소재라고 한다.



성 이삭성당의 대리석 기둥을 세우는 방법 동영상


평소에는 이 지성소 문을 닫아 두는데 오늘은 열려 있어 지성소 안의 사제들이 머무는 공간인 제단 안과

제단 안쪽 창문 부활하신 예수님의 스태인드글스를 볼 수 있었다.


성이삭성당(St. Isaac's Cathedral)을 배경으로




















그리스도부활교회 (피의 사원)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그리스도 부활 교회로  전통적인 러시아 건축양식중 하나인 모자이크 프레스코로 장식된 그리스도 부활 교회가 피의 사원이다. 알렉산더 2세 암살 기도가 있었던 바로 그 곳에 1883 - 1907년에 걸쳐 세워졌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피의 사원"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교회의 내부는 27년간의 복구 끝에(1907년 첫 개관 이후로 90년후) 드디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그 안에는 알렉산더 2세가 상처를 입었던 정확한 위치가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현란한 모자이크 장식으로 인해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성당의 앞뒤로 아홉 개 돔이 올려져 있고 전면 너비 52m, 높이 81m에 이른다.

 제정 러시아 말기 1883년부터 1907년까지 24년에 걸쳐 황실이 지은 성당이다. 유럽을 모델로 삼아 건설한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부에서 유럽풍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건물 말고 17세기 모스크바공국 시대의 비잔틴 양식이 가미된 러시아 특유의 건축 양식을 간직하고 있다.모스크바의 성 바실리성당을 모델로 삼아 지었다고 한다.

피의 사원(그리스도부활성당)의 외관이 너무 아름 다워 성당을 한바퀴 돌면서 각 방향에서 바라본 사진을 올린다

정면 중앙 박공에 붙어 있는 커다란 모자이크화가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에 머리가 길고 수염을 기른 장년의 그리스도가 오른손은 축복의 표시를 하고 왼손에는 복음을 나타내는 책을 들고 있다.  이런 예수상을  만능의 주(主)를 의미하는 판토크라토르(팬토크레이터)라고 한다. 판토크라토상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엔 세례 요한, 왼쪽엔 성 게오르기(조지)가 무릎을 꿇고서 앉아있다. 성 게오르기 대신 성모가 요한과 함께 인류의 죄를 사면해달라고 청원하는 그림은  데이시스(디시스-Deisis)라고 하는데​ ​성모 자리에 성게오르그가 있는 그림은  매우 드물다고 한다. 성 게오르기는 유럽 뿐만아니라 러시아에까지 성인으로 받는 분이다. 데이시스에 성모 대신 게오르기가 그려져 있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인듯하다

그리스도부활성당(피의 사원)뿐만 아니라 러시아정교회의 내벽에는 수많은 이콘화(성상화)가 그려져 있다


성당안 중앙돔 위에 새겨진 예수님

안렉산드르 2세의 관

경건한 성당에 어울리지 않게  '피의 사원'이라는 별칭이 붙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안렉산드르 2세는 농노제를 폐지해 2000만명을 해방시켜  '해방자 짜르(황제)'라고 불렀던 개혁 군주이다.​

​지방자치제와 배심원 사법제도까지 진보적 제도를 정착시켰다.​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 정치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 유럽 유학을 다녀온 청 년 장교들의 군사 혁명이 실패한 이래 러시아엔 꾸준히 자유를 갈망하는 사회 개혁 움직임이 일었고  1870년대엔 인민해방 운동과 직업적 혁명가들이 등장합니다.

운동가 그룹 중에 '인민의 의지'라는 급진 혁명운동 조직이  1881년 아침 알렉산드르 2세가 마차를 타고 산책 나왔다가 입헌군주제 도입 방안에 서명하러 궁으로 돌아가던 길목에서 짜르(황제)를 습격한다 ​ 조직원 두 명은 이곳 그리보예도프 운하 곁을 지나던 알렉산드르2세의 마차에 수류탄을 던진다.

마차가 심하게 흔들렸지만 황제는 다치지 않았고 마차에서 내려 범인을 꾸짖는다.

그 사이 다른 한 명이 폭탄을 터뜨려 자신은 죽고 황제에게 중상을 입힌다.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옮겨졌지만 몇 시간 뒤 숨을 거두고 만다. ​

아들 알렉산드르 3세가 아버지를 추모해 아버지가 피 흘린 피습 장소에 세운 것이  그리스도부활성당이자 '피 위에 선 교회' 피의 사원이라고 한다.

피의 사원 중앙 정면에 위한 지성소의 문그 위의 돔 안에 그리스도부활 이콘화가 그려져 있다

천정에 매달린 화려한 샹들리에






또 다른 천정 돔 안의 이분이 바로 성 게오르기성인이다

피의 구세주 성당

피의 구세주 성당

피의 구세주 성당

카잔성당





넵스킨대로


다음편에는 모스코바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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