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6.29 13편 스웨덴 감라스탄, 바사호박물관,왕궁
스웨덴 스톡홀름 바사 호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전함으로 1625년에 건조되어 1628년 8월 처녀항해 때 스웨덴 스톡홀름항에서 침몰하고 333년 후 1961년에 인양된 왕실 전함
스톡홀롬 왕궁은 감라스탄 지구에 자리잡고 있는데 13세기 건축 당시에는 요새로 지어졌다가 이후 왕궁으
로 사용되었으나 현재의 왕궁은 1697년 화재로 대소실되었다가 1754년 완성,1982년까지는 왕과 왕비가
거주 했지만 시외곽 드로트닝홀롬 궁전으로이주하면서현재는 외교사절단 숙소나 왕족 집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감라스탄거리 풍경
이곳 스톡홀름은 발트해와 멜라렌호(湖)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항구인 것이다. 우리가 내린 곳은 ‘감라스탄(Gamla stan)’, 감라스탄이란 스웨덴어로 ‘옛 도시’를 뜻한다. 따라서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의 구 시가지라고 보면 되겠다. 감라스탄은 ‘스타스홀멘 섬(Stadsholmen)’에 위치하며 다리 사이에 위치한 거리를 뜻하는 ‘스타덴 멜란 브로아르나(Staden mellan broarna)’라고 부르기도 한다. 감라스탄 주변에 있는 작은 섬들로는 리다르홀멘 섬(Riddarholmen), 헬게안스홀멘 섬(Helgeandsholmen), 스트룀스보리 섬(Strömsborg) 등이 있다.
널따란 광장을 따라 들어가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아마 스톡홀름궁 남쪽 길이자 광장인 슬로츠바켄(Slottsbacken)일 것이다. 오른편에 ‘스톡홀름 궁전(Stockholms slott)’을 끼고 들어가다 보면 정면으로 ‘성 니콜라스교회(Storkyrkan, The Great Church)’라고도 불리는 ’스톡홀름 대성당(Stockholms domkyrka)‘이 나타난다. ’감라트탄‘ 지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건축물이지만 일단은 제켜두고 왕궁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18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놓은 왕궁 또한 두 번째 가라하면 서러워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아니 입헌군주제인 이 나라에서는 왕실의 거주지인 이곳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그 외에도 이곳 감라스탄에는 ’노벨 박물관‘과 스웨덴 왕실의 묘소로 사용되고 있는 ’리다르홀름 교회(Riddarholm)‘ 등이 있다. 감라스탄 북서쪽에는 기사의 관저(Riddarhuset)가 들어서 있다.
왕궁 경비대의 교대
왕궁 경비대의 교대 광장 쪽으로 나있는 왕궁의 문 앞에는 근위병 두 명이 보초를 서고 있다. 운이 좋았던지 마침 근무교대 의식을 치르고 있다. 절도 있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기 좋아 한참을 구경해본다. 그런데 교대를 하고 있는 4명 가운데 1명이 여성이다. 남자들 일색이었던 다른 나라의 근위병들만 보아왔기에 낯선 풍경으로 비쳐진다
왕궁경비 무척 엄하다
성당의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스톡홀름 궁전(Stockholms slott)’의 정문이 나있는 광장으로 들어설 수 있다. 아니 왕궁을 오른편에 끼고 걷다가 끝나는 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참고로 이 왕궁의 주인인 스웨덴 왕실(Swedish Monarchy)은 970-1060년의 ‘웁살라(Uppsala)왕가’로부터 시작되어 ‘스텐킬(Stenkil)왕가’, ‘스베르커(Sverker), 에릭크(Erik)왕가‘, ’벨보(Bjelbo)왕가‘등을 거쳐 1818년부터는 ’ 나도테(Bernadotte)왕가‘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실권은 없다. 국왕은 국가원수의 지위를 갖지만 1975년의 헌법 개정으로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국왕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으며 국회의 개원, 외교사절의 임명 및 접수 등 의례적인 직무만 행한다. 현재의 국왕은 1973년에 즉위한 ‘구스타브 16세’이다. 1976년에 결혼한 ‘실비아 소머래스(Silvia Sommerlath)왕비’와의 사이에 왕세녀 빅토리아(Victoria:1977년생)와 칼 필립(Carl Philip:1979년생), 마델라이네(Madeleine:1982년생) 등 1남 2녀를 두었다.
안으로 들면 둥근 반원형 날개 건물 둘이 에워싼 널따란 광장이 나온다. 아니 한쪽 귀퉁이에 적혀있는 지도를 보니 ‘yttre borggården’이라고 적혀 있다. ‘yttre borggården’의 ‘yttre’는 스웨덴어로 ‘바깥의’ 또는 ‘외부의’, 그리고 ‘borggård’이 ‘성내의 마당’을 뜻하는 각각의 단어이니 ‘바깥쪽에 있는 왕실 정원’ 쯤으로 여기면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말이 정원이지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이다. 이럴 때는 ‘바깥마당’이라고 표현하면 될 듯도 싶다. 아무튼 안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왕궁 건물이 ‘ㅁ’자 모양으로 에워싸고 있는 ‘안마당(위에 첨부된 사진에는 Inre borggården로 나와 있다)과 대비시킨 이름이지 싶다.
왕궁의 정문(正門)은 이곳 ‘외부 정원’으로 나있다. 정문 또한 근위병들이 굳게 지키고 있다. ‘스톡홀름 궁전(Stockholms slott)’은 이탈리아의 바로크 양식과 프랑스의 로코코 양식이 결합된 건물이다. 13세기에 요새로 처음 지어진 후 왕궁으로 발전했으나, 1697년 대화재로 피해를 입어 오랜 복원 공사 끝에 1754년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1982년까지 왕과 왕비가 실제로 거주하던 곳이었지만 스톡홀름 외곽의 ‘드로트닝홀름 궁전(Drottningholm Palace)’으로 이사하면서 지금은 외교 사절단의 숙소나 스웨덴 왕족이 집무를 보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3층 높이의 건물 안에는 유명한 장인과 예술가들의 손길로 아름답게 장식된 방 1430개가 있는데 일부는 관람객들에게 공개된다. 그중 압권은 ‘보물의 방(Royal Treasury)’이라고 한다. 에릭 14세의 왕관을 비롯한 역대 왕실의 보물들을 볼 수 있단다
동서 89m에 남북이 77m인 '바깥마당'은 궁전 본 건물을 타원형으로 생긴 두 개의 건축물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본 건물을 가운데에 두고 전면의 양쪽에서 둥글게 뻗어 나온 날개 회랑(回廊)이 에워싼 모양새라고 보면 되겠다. 오른편 날개 회랑 앞에는 몇 문의 대포가 진열되어 있다. 자세히 보려고 다가가니 정문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근위병이 고함을 지른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들어가지 말라는 표시가 되어있다. 넘어가지 말아야할 요소가 눈에 띄지 않는 걸 보면 무슨 행사 준비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왼편 날개 회랑 뒤로는 ‘스톡홀름 대성당’의 첨탑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아무튼 날개화랑의 프리즈(frieze, 고전건축에서 주두에 의해 지지되는 부분인 ‘엔타블레이처’의 3부분 중 가운데 것)를 따라 띠처럼 옛 투구와 갑옷, 무기들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왼쪽 날개화랑의 한가운데에는 여인의 동상 하나가 세워져 있다. 주인공은 종교의 개종(改宗)을 위해 여왕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난 ‘크리스티나 여왕(Drottning Kristina, 재위 1632-1654)이다. 본명이 ’마리아 크리스티나 알렉산드라(Maria Christina Alexandra, 1626-1689)‘인 그녀는 부왕인 ’구스타브 2세(Gustav II Adolf of Sweden)‘가 가톨릭국가와 개신교(루터교회) 사이의 종교전쟁인 ’30년 전쟁(Thirty years’ War, 1618~1648) 중 ‘뤼첸전투(1632)’에서 죽자 불과 6세의 나이로 추정상속인으로서 스웨덴의 왕좌를 물려받는다. 어린 크리스티나는 부친 재임 시절 재상을 역임했던 청렴한 성품의 ‘악셀 옥센셰르나(Axel Oxenstierna)’와 5명의 섭정 대신의 헌신적 도움을 받아가며 정치, 행정, 군사, 외교를 위한 다양한 외국어 교육을 이수 받는다. 이때 그녀를 가르치던 유럽의 1급 석학(碩學)들 가운데 한 명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하다’는 명언으로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이다. 1644년 18세가 된 크리스티나는 섭정에서 벗어나 정식 여왕으로 등극한다. 그리고 재임 중에 ‘30년 전쟁’을 종식 시키면서 독일과 ‘베스트팔렌 조약(1648)’을 체결해 막대한 토지와 전쟁 배상금을 받아낸다. 또한 신문 발간, 웁살라 종합대학 설립, 미술품 구입 등 문화와 교육, 예술에 대한 지속적 투자를 시도해 스웨덴을 서유럽 국가와 버금가는 부국강병으로 만드는 초석을 제공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엉뚱한데서 발생한다. 개신교가 국교인 나라의 여왕이 가톨릭으로 개종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스웨덴에는 ‘가톨릭으로 개종한다면 왕위를 포기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결국 그녀는 재임 10년째인 1654년에 전격적으로 퇴위를 선언한다.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위해 서슴없이 왕위를 버린 것이다. 당시 그녀는 왕권을 행사하는데 절정의 나이인 28세였으니 스웨덴으로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퇴위한 뒤에도 그녀는 ‘도나 여백작(Countess Dohna)’으로 활동한다.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크리스티나는 모국 스웨덴을 떠나 프랑스와 이탈리아 로마에서 말년을 보냈으며, 로마 체류 중이던 1689년 향년 63세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그리고 ‘성 베드로 대성당’에 묻힌다.
왕궁을 다 둘러봤으면 이젠 ‘감라스탄’의 옛 골목을 거닐어볼 차례이다. ‘스톡홀름 대성당’의 옆으로 난 골목길로 들어서면 된다. 감라스탄은 13세기부터 형성되었으며 중세 시대에 건설된 도로와 거리, 오랜 역사를 가진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다. 17세기부터 18세기 이전에 지어진 수많은 건축물들이 주류를 이룬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이곳 감라스탄은 슬럼으로 간주되었고 역사적 건축물들 가운데 대부분은 방치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수많은 벽돌들과 5개의 골목길이 스웨덴 의회의 확장 공사로 인해 파괴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중세 시대의 거리와 르네상스의 건축물들이 세간의 주목을 끌게 되면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감라스탄의 구시가지는 옛 모습 그대로이다. 혹자는 이곳의 분위기를 ‘커피 집 광고에 나오면 딱 어울릴 것 같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맞는 말이다. ‘밀레니엄 버그(millennium bug)’로 온 세상이 떠들썩하던 1999년에 이곳 스톡홀름을 다녀간 일이 있었다. 당시 동행을 했던 국내 일간지의 중견기자와 이 부근의 뒷골목을 거닐었는데 그가 감탄사 끝에 내뱉던 넋두리도 이와 비슷했었다. 그런데 당시보다 훨씬 더 복잡해진 도시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눈에는 오죽 이질적인 풍경으로 다가오겠는가. 아무튼 이런 길은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길바닥은 돌을 깔아놓았다. 오래 묵은 건물들과 함께 묶어지니 중세의 느낌은 한층 더 짙어진다. 어쩌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들어올 만한 길도 보이지만 대부분은 좁디좁아 자동차는커녕 자전거도 못 다닐 형편이다. 오롯이 사람들 차지가 되었다는 얘기이다. 아무튼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은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기에 그만이다. 중세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거리를 걷다 보면 16세기 유럽의 어느 마을 속에 와 있는 듯하다. 실제로 감라스탄은 13세기에 형성되어 지금까지 명성을 이어 온 곳으로, 건물 외벽에서 묻어나는 세월의 흔적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역사다. 지금은 스톡홀름의 부자들이 모여 사는 고급 주택가로 거듭났지만 그리 부담스러운 분위기는 아니다. 오히려 저렴하게 스웨덴 전통 요리를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이 많아 주머니 가벼운 여행자들이 선호한다.
감라스탄거리에서 한잔의 여유
감라스탄거리
골목길을 대충 돌았다 싶으면 옛 건물들이 에워싼 장방형의 광장이 나타난다.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데도 '큰 광장'이라는 뜻의 ‘스투르토리에트(Stortorget)’란 이름을 얻었다. 감라스탄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14세기부터 18세기까지만 해도 시청이 들어서 있던 중심 광장이자 스톡홀름에서 가장 유서 깊은 광장이었다. 이 광장은 1520년 11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 국왕이 이끄는 덴마크 군대가 스웨덴의 귀족들을 학살한 ‘스톡홀름 피바다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폭동과 내전이 일어나면서 칼마르 동맹이 해체되었고 ‘구스타프 1세’ 바사가 스웨덴의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그런 유명세 덕분에 이 광장은 감라스탄에 온 여행자라면 빼놓지 않고 꼭 들러보는 명소가 되었다.
거리의 커피집들
광장의 복판에는 꼭대기에 화병 모양의 장식을 얹은 오래된 우물이 하나 있다. 고풍스러우면서도 괴상하게 생긴 모양새처럼 '해골의 샘'이란 섬뜩한 별명을 갖고 있는 우물이다. 3국 연합시대 말기인 1520년 스웨덴을 지배하던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가 말을 듣지 않는 이유로 스웨덴 귀족 90명의 목을 쳐 묻은 곳에 세운 우물이어서 그런 별명을 얻게 되었단다. 그 귀족 중엔 독립 스웨덴 왕국을 세운 바사왕, 구스타브1세의 아버지도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스웨덴 독립의 기폭제가 된다. 3년 뒤 바사가 이끈 농민과 귀족들이 덴마크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우물의 설계는 노벨박물관을 설계했던 엘름 팔름스테트(Elm Palmstedt)가 맡았다. 참고로 이 우물은 더 이상은 샘물이 아니라고 한다. 1859년 샘물이 마르면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1950년대에 옛 모습으로 복원하면서 상수도로 연결을 시켜 놓았단다.
여유있는 여행시간
광장의 랜드 마크(landmark)는 ‘노벨 박물관(Nobel Museum)’이라 할 수 있다. 2001년 노벨상 제정 100주년을 기념해 문을 열었는데 역대 노벨상 수상자 자료를 모두 전시하고 있으며 수상자들과 관련된 짧은 영상을 개관 시간 내내 상영한다. 또한 700여 점이 넘는 오리지널 발명품과 초기 컴퓨터가 전시되어 있으며, 세계를 바꾼 발명품인 다이너마이트, 다양한 발명 모형, 책 등도 함께 볼 수 있다. 박물관 자료가 그리 풍부하지 않아서 약간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의 모습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점에서 뜻깊은 공간이다. 1층 카페의 의자 뒤에는 노벨상 수상자들의 친필 사인도 있다고 한다. 원래 이 건물은 '주식시장 건물(Börshuset)'이었다. 시청이 인근 본데(Bonde)궁으로 옮겨 가고 난 1778년에 시청이 있던 그 자리에다 프랑스 고전주의 양식으로 새로 지었다. 설계는 스웨덴의 건축가인 ‘엘름 팔름스테트(Elm Palmstedt)’가 맡았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왕궁이나 귀족의 저택과 같은 외형이나 옥상에 랜턴형 돔(dome)을 올려 공공건물이라는 걸 강조했단다. 그러다가 일층에 있던 증권거래소가 1998년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2001년 노벨상 백년을 기념해 노벨박물관이 새로 들어섰다. 이층에는 ‘스웨덴 한림원(Svenska Akademien/ Swedish Academy)’이 입주해 있다고 한다. 스웨덴 문학의 정통성을 지키는 왕립 학술기관으로 해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선정 발표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참고로 물리학상과 화학상, 경제학상은 스웨덴 왕립 과학아카데미가, 생리-의학상은 스톡홀름에 있는 카롤린스카 의학연구소가, 평화상은 노르웨이 의회가 선출한 5인 위원회가 심사하여 선정한단다.
감라스탄거리
’스톡홀름 대성당(Stockholms domkyrka)‘이 나온다. 성 니콜라스교회(Storkyrkan, The Great Church)’로도 불리는 이 건축물은 1279년에 벽돌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원래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여러 번 증·개축을 반복하면서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이 섞인 독특한 모습을 지녔다. 예로부터 스웨덴의 중요한 행사는 대부분 이곳에서 열려왔으며, 특히 역대 국왕의 대관식과 결혼식 등이 거행된 장소로 유명하다. 이곳 역시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없었다. 문이 열려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가와 귀족들의 문장으로 장식된 성당의 내부는 볼 것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489년에 성당에 기증되었다는 높이 4m의 나무조각상 ’성 예란(St. GÖRAN)의 기사상(騎士像)‘이 유명하다. 용(龍)과 싸우는 용감한 기사의 형상을 조각한 이 목조상은 섭정(攝政, 기간 1470-1497))이었던 ’스텐 스투레 1세(Sten Sture Ⅰ)’와 그의 부인이 ‘부룬케베리 전투(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세‘를 크게 무찌른 전투)’의 승전에 대한 사의를 표시하기 위하여 만들게 한 작품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당의 문이 열려있지 않아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와 봤다.
문 앞에 마르틴 루터의 제자 ‘울라우스 페트리(Olaus Petri/ 1493~1552)’의 동상이 서있다. 바사왕으로 불리는 ‘구스타브 1세’를 도와 루터의 종교개혁을 스웨덴에 전파한 종교지도자로 스웨덴의 국교인 루터교의 기반을 닦았다. 신약을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설교집과 스웨덴연대기, 스웨덴 최초의 희곡을 쓴 스웨덴 문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의 동생 ‘라우렌티우스 페트리(Laurentius Petri, 1499~1573)’는 스웨덴 최초의 신교(新敎) 대주교가 됐다고 한다.
슬로츠바켄(Slottsbacken) 광장의 한쪽 귀퉁이에 ’칼14세‘의 청동 기마상이 보인다. 그런데 임시로 보관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아마 원래 있던 자리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보다. 아무튼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초의 스웨덴은 ’오스트리아 계승전쟁‘과 ’7년 전쟁‘에 무의미하게 참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 많은 영토까지 잃었다. 또 나폴레옹 전쟁 때에도 처음의 반(反) 나폴레옹의 입장에서 전환하여 러시아와 싸워 핀란드를 잃었으며, 그 후에는 나폴레옹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프랑스 장군 베르나도테를 황태자로 맞아들였다. 1809년 베르나도테는 ’칼 요한‘이라 칭하며 국가의 실권을 장악하고 반 나폴레옹의 태도를 취했으며, 1814년에는 덴마크로부터 노르웨이를 얻어내기까지 했다. 그리고 1818년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칼 14세‘이자 현 스웨덴 왕조의 시초이다
왕궁의 경비와 함께
바사박물관: 바사호는 1628년8월10일 처녀 항해를 나선후 스톡홀롬 항구에서 침몰했습니다.
그 후 333년이 지난 1961년 난파된 바사호가 다행히도 해저에서 인양되었습니다. 복원된 범선 바사호는 수백여개의 조각상으로 웅장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원형의 98퍼신터가 보존되어 잇습니다.
바사호는 17세기 초의 스웨덴의모습을 엿볼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하며 오늘날 전세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관광명소중 하나입니다.
침몰 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갑판 위를 지나다녔을까요?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전함이고 첫 전함이니만큼 얼마나 정성들여 설계하고 제작했을까요?
바로 모형으로 보는 바사호 전체 형상 입니다.
바사박물관(The Vasa Museum)‘이다. ’구스타브 2세(Gustav II)‘가 재위하던 1625년에 건조되어 1628년 8월 10일 처녀항해 때 침몰한 전함 ’바사(Vasa) 호(號)‘가 전시된 곳으로, 스톡홀름의 스칸센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침몰된 이후 1956년에 해양 고고학자인 ’안데스 프란첸(Anders Franzen)‘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침몰한 지 333년만인 1961년에 인양되었다. 1962년 임시 박물관이 문을 열어 이곳에서 1979년까지 보호액을 뿌리는 작업이 계속되다가, 1988년 반 정도 완성된 새로운 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1990년 정식으로 ’바사박물관‘이 개관되었다. 박물관은 누드 콘크리트로 골조와 벽을 세우고 지붕엔 구리판을 씌웠다. 윗부분 측면은 어두운 색으로 칠한 나무 패널(panel)을 붙였다. 전체적으로는 바사호를 추상화한 형상에다 돛을 세움으로써 배의 모양을 더 확실히 나타내려 했다.
안으로 들면 바사호의 위용(威容)에 주눅부터 든다. 7층 정도의 높이라는 어마어마하게 큰 공간을 바사호 한 척이 온통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닥에서 돛대까지의 높이가 52.5m이며 함체 높이만 해도 19.3m로 5층 건물의 높이에 해당된단다. 선체 길이는 47.5m, 뱃머리의 사자상이 내민 보우스피리트까지 합칠 경우엔 무려 69m에 이른단다. 전시된 ’바사호‘는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또한 바사호 발견 당시 해저탐색에 사용된 잠수복, 배 안에서 발견된 보석상자 등도 전시돼 있다. 총 4층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의 각 층에서는 바사의 준공과 취항, 침몰, 인양의 각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 곳 박불관은 2~7층까지 구성되어 있으며 두 이 한배를 눈높이 별로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윗 층에서는 배의 갑판을 볼 수 있고 래층에서는 배 바닥을 받치는 골을 볼 수 있습니다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17세기 선박인 ’바사(Vasa) 호‘는 원형의 95% 이상이 보존되었다고 한다. 이 배는 ’구스타브 2세(Gustav II)‘가 재위하던 1625년에 건조된 호화 전함이다. 총길이 69m, 최대 폭 11.7m, 높이 52.2m, 배수량 1210t, 적재 대포 64문, 탑승 가능인원은 450명이었다. 1628년 8월 10일 스웨덴의 해군력을 과시하기 위해 스톡홀름 항에서 폴란드로 첫 항해에 나섰지만 불과 30분 만에 침몰해버리고 만다. 애초 계획보다 많은 대포와 포탄을 배에 싣는 바람에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 채 돌풍에 가라앉고만 것이다. 1956년 해양 고고학자인 안데스 프란첸(Anders Franzen)에 의해 발견된 ’바사 호‘는 침몰 이후 333년 만인 1961년에 인양됐다. 전함에서는 1만 4000개 이상의 목조품과 700여 개의 조각상, 선원들의 유골과 유품들이 함께 발견됐다. 이 선박의 유물은 17세기 조선술 연구에 유익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이 곳 박불관은 2~7층까지 구성되어 있으며 두 이 한배를 눈높이 별로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윗 층에서는 배의 갑판을 볼 수 있고 래층에서는 배 바닥을 받치는 골을 볼 수 있습니다.
배의 앞쪽이 낮고 뒤로 갈 수록 높아지는 계단식 구조 입니다.
바사 박물관에 전시된 이 배는 스웨덴에서 가장오래된 전함 바사호로서 625년 건조되어 1628년 8월 10일 처녀항해 때 멀리가지 못하고 침몰되면서 바닷속에 333년 동안 잠들어 있다 1956년에 인양된 배 입니다.
그 당시 북유럼 발트해 주변 제국 건설에는 해군력이 필수 였기 때문에 엄청난 크기의 군함을 제작하였죠.
길이 69m, 높이 48.8m에 450명이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배지만 달려있는 하나하나마다 예술적 가치가 느껴질만큼 멋진 문양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렇게 나무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바사호!~
나무와 나무를 연결하는 곳에는 볼트를 사용했는데 333년간 물속에 잠겨 있어 부식되어, 약 5,000여개의 볼트를 모두 교체하였다고 합니다. 최근에 교체 했군요. ^^
맨 아래층에 가면 바사호에서 발견된 유골이 원형 그대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바사호가 침몰할때 약 150여명 중 30여명이 익사 했다고 합니다.이 중 1961년 인양될때 25구의 유골이 발견되었구요.
원인은 바로 선체 하부에 위치한 좌우 밸런스를 맞추기 위한 더미들을 잘 못 계산하여 한쪽으로 기울면서 침몰 하게되었다고 합니다.
현대의 배에는 밸러스트 탱크라고 하여 담수와 해수를 이용하여 배의 균형과 잠김 정도를 조절하는데 이 당시에는 이렇게 고정된 물체로 하다보니 발빠른 대응이 어려웠겠죠. 그리고 이만한 크기의 군함은 처음이었고 첫 출항인 처녀항해 였으니
이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겠죠
그럼 이 멋진 바사호는 왜 침몰했을까요? 바사호는 먼 바다가 아닌바다로 나가는 길목에서
침몰되었고가장 웅대하고 큰 전함의첫 진수였기 때문에많은 국내외 귀빈들이지켜보는 가운데 침몰되었다고 합니다
1956년 발견되어, 1961년 인양될 때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이 바사호는 1962년부터 임시 박물관에 있다가 1988년 이곳 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1990년 바사 박물관으로 개관하였습니다. 현재는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관광객이 많이 찾는 박물관이라고 합니다.
박물관 내부는 배를 가운데다 놓고 지하까지 포함해 총 여섯 개 층에 빙 둘러 복도를 내어 관람 공간으로 만들었다. 다양한 각도에서 배를 구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리라. 만일 아래층에서부터 빙빙 돌면서 위로 올라갈 경우에는 배의 전모(全貌)를 빠짐없이 눈에 담을 수 있다. 배의 가장 높은 부분까지 가까이서 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래도 미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실물을 10분의 1로 축소했다는 모형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실물에는 없는 돛을 더했을 뿐만 아니라 화려한 뱃머리, 꼬리, 뱃전의 조각상과 장식들을 원래 색깔대로 복원해 바사호의 당시 모습이 어땠는지도 알아차릴 수 있게 했다.
바사호 내부의 작은 모형도~~
일반의 범선(帆船)도 전시하고 있다. 가이드는 뭔가를 열심히 설명해 주었지만 다른 것에 신경을 쏟다보니 하나도 듣지 못했다. 아무튼 박물관은 거대한 선박의 본체와 아름다운 선미의 조각, 선원들의 옷가지와 물품 등과 더불어 당시 선박의 구조와 선원들의 활동을 볼 수 있는 미니어처까지 세심하게 진열해 놓았다. '30년 전쟁' 때 발틱 해를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함 바사 호는 당시에는 적들을 하나도 죽이지 못했지만, 수백 년 뒤에는 세계의 여행객들을 사로잡고 있다.
그때 당시 배의 선원들의 모습을그림으로~~
바사 호에 부착되었다는 인형~~
배의 선실을 실물크기로 복원해 선원들의 당시 생활상은 물론이고, 대포 등 무기들의 사용 방법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했다. 그런가하면 배의 단면도(斷面圖)를 만들어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굳이 설명을 듣지 않고도 직관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의 유골을 복원하고 그 유골의 흉상을 제작해 전시해 놓은 것도 인상적이다. 당시 사람들의 외모와 의상과 심지어는 그들의 소지품까지 전시해 놓았고 배를 만드는 과정과 당시의 채색이나 장식들에 대한 자료들도 전시를 해 놓았는데 배를 칠했던 도료들과 조각들과 카펫까지 모두 전시했다. 화려한 색채와 조형성이 강조된 부조들은 아름답기 짝이 없다.
노르딕 박물관(Nordic Museum)은 스톡홀름 바사 박물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국립문화사 박물관으로 1873년 스웨덴 민속학자이며 교육자인 A. 하셀 리비우스가 설립했고 스웨덴 및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의 과거 생활을 보여주는 가구, 의복 , 장난감 등을 사거나 기증받고, 이후 물품들을 수집하고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을 빠져나오면 중세의 궁전을 닮은 거대한 건축물이 나타난다. 바사박물관과 마주보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노르디스카(Nordiska)박물관‘이라는데 여행사의 일정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다. 대신 그 내력이나 소개해 볼까 한다. ’노르디스카‘를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북방민족‘이라는 뜻이니 ’북방민족 박물관‘이라 부르면 되겠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민속박물관‘이란다. 박물관은 건축가 ’이삭 구스타프 클라손(Isak Gustaf Clason)‘이 디자인했다고 한다. 1907년에 개관했는데 전시분야는 인형의 집(Doll’s House), 테이블 세팅(Table Settings), 스웨덴 민속예술(Swedish Folk Art), 장남감(Toys), 인테리어(Interiors), 패션의 힘(Power of Fashion), 전통(Traditions), 섬유갤러리(Textile Gallery), 스웨덴 가정(Swedish Homes) 등이란다.
대성당은 스톡홀롬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1279년도에 지어졌다고 한다. 대성당에서는 왕실의 결혼식,대관식이 거행 된다고 하며 지속된 증개축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내부 제단 벽 부분은 흑단과 금으로 장식되어 있어 화려하고 웅장한 대성당으로 알려지고 있다.
감란스탄 거리는 중세의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독특한 멋과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거리로 유명하다
탈린으로 가기위해 발틱해의 호화유람선을 타기로
에스토니아 탈린으로 가기위해 발틱해의 호화유람선 칼린크 탑승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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