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감영

2022.6.20

촬영:이수연

개설

『전라감영지(全羅監營誌)』는 1790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라도 관찰사영(全羅道觀察使營)의 지리지로, 총 18개 항목과 채색지도 1장으로 구성되었다.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서지적 사항

1책(34장)으로 구성된 필사본이며, 크기는 세로 35.9㎝ 가로 24.3㎝이다. 표제는『전라도관찰사영지(全羅道觀察使營誌)』이고, 내제는 「전라감영지」이다. 정확한 편찬과 발간 경위는 미상이다.

내용

책 앞에 수록된 채색 필사본 지도에는 전주성 내부의 관아 건물과 주변 지역이 묘사되어 있어서 18세기 후반 전주의 공간 구조를 파악해 볼 수 있다. 「선생안」조의 마지막 인물인 전라감사 민태혁(閔台爀)은 1789년(정조 13) 12월에 부임하여 1790년(정조 14) 4월에 이임했다. 그런데 1789년 12월에 그가 부임한 기록만이 있고 그 이후에 행적이 없으므로, 1790년경에 편찬된 것이라 추정된다. 「호구」조에 1789년까지의 기록만이 보인다는 점에서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이 시기는 정조의 명으로 ‘해동읍지’가 전국적으로 편찬되던 때이어서 본 읍지도 해동읍지 편찬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항목은 건치연혁, 관직, 성지(城池), 관실(官室), 공해(公廨), 창고, 진공(進貢), 고적, 제영(題詠), 선생안, 호구, 전결, 군액, 조적(糶糴), 봉름(俸廩) 책판(冊板), 선창(船滄), 군기(軍器) 등 18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관직」조에는 관찰사, 부윤(府尹)을 비롯하여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중군, 도사, 부사, 현령, 군수, 만호 등 전라 감영 내의 관직과 관원 수, 재임 장소 등을 기록했다. 「궁실」에는 경기전, 조경묘, 실록각 등에 관한 사항이 있고 「공해」조에는 풍시관, 선화당, 관풍각, 연신당, 시정루 등에 관한 내용이 있다. 「진공」 물품으로는 전복, 생선, 생은구어, 건수어, 구비석수어(仇非石首魚) 등 수산물이 많고 「제영」조에는 권근, 권극중, 이경석, 이사명, 박태순, 조현명 등의 시문이 있다. 「선생안」은 19장으로 감영지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1361년(공민왕 10) 고려시대의 안렴사(按廉使) 권사복의 부임을 시작으로 1388년(창왕 1) 도관찰 출척사(黜陟使) 최유경, 1789년(정조 13)에 부임한 민태혁까지 전라도 관찰사의 명단이 수록되었다.

 

전라감영지

2000년 9월 8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 전주에 설치된 전라감영은 1896년까지 전라남·북도를 포함하여 제주도까지 통할하는 관청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감사의 임무가 관내 각처를 수시로 돌아다니며 감독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감영시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유영() 체제로 바뀜에 따라 비로소 감영의 역할이 부각되었다.

전라감영은 성곽으로 둘러싸인 전주부 내에서 T자형으로 난 동서로와 남북로를 중심으로 하여 남서쪽에 있었고, 남북로를 경계로 하여 전주관아가 반대편에 있었다. 지금은 터만 남아 감영의 초기 모습을 알 수 없으나, 18세기에 이르러 정청()인 선화당()을 비롯하여 감사의 처소인 연신당(), 감사 부친의 처소인 관풍각(), 감사의 가족 처소인 내아(), 예방비장()의 집무소인 응청당(), 6방 비장의 사무소인 비장청(), 감사의 잔심부름을 맡아 하는 통인청(), 하부 실무자들이 일하는 곳인 작청(), 정문인 포정루() 등 25개의 시설을 갖추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이곳에서 집강소() 설치를 위한 전주화약을 맺었으며, 농민군 총대장 전봉준()은 집강소를 총괄하기 위하여 선화당에 대도소()를 설치하였다.

그 이후 별다른 변화가 없다가 국권침탈 이후 선화당 등을 일제의 청사로 쓰면서 많은 건물이 철거되어 1943년에는 선화당·작청·진휼청·통인청만 남았다. 1951년에는 당시 경찰서 무기고에서 폭발이 일어나 선화당을 비롯한 부속건물이 불에 탔고, 지금은 선화당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회화나무만 의회 마당에 남아 있다. 폭발이 있은 이듬해 그 자리에 전라북도청사가 들어섰고 이후 의회 및 전라북도경찰청 건물이 들어섰다. 주변에 풍남문(:보물 308), 전주전동성당(殿:사적 288), 경기전(殿:사적 339) 등의 문화재들이 있다.

전라감영 :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4가 1-6

관람시간 : [하절기 3월 1일-10월 31일] 09:00-21:00 [동절기 11월 1일-2월 28일] 09:00-18:00

무료 관람

전주 전라감영(全羅監營)은 조선시대의 8개 도(道) 가운데 하나인 전라도의 행정, 사법을 담당하던 관찰사가 근무하던 곳이다.오늘날의 도청(道廳) 소재지 및 도청 건물에 해당한다.

1392년(태조 1년) 조선왕조 성립과 동시에 전주에 전라감영이 설치되었으며,

1895년(고종 32년)에 23부제가 실시될 때까지 약 500년간 존속하였다.

 

1895년에 23부제가 시행되자 전주부 관찰부로 개편되고

1896년에 13도제가 시행되자 전라북도의 최고 관청으로 활용되었으며,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도청(道廳)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중심 건물인 선화당은 도청의 부속 건물 용도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 시기인 1951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내삼문(內三門)은 전라감영 선화당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전라감영의 정문 포정루로 들어와 중삼문을 거쳐 내삼문을 지나면 전라감사의 집무처 선화당이다.

내삼문은 솟을삼문 형태로 어칸에서 협칸, 퇴칸으로 가면서 지붕의 높이가 낮아지는 형태이다.

1884년 11월 11일에 전주를 방문한 미국 임시 대리공사 George Clayton Foulk(1856-1893)는

"포정루에서 150피트 정도에 첫 번째 대문(중삼문으로 추정)과

직각으로 100피트 정도에 두 번째 대문(내삼문으로 추정)이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國家軍儲皆靠湖南(국가군저 개고호남) 若無湖南是無國家(약무호남 시무국가)'

'국가 군량, 군사, 군비를 호남에 의지했으니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

右載在李忠武公全書下卷(우재재이충무공전서하권) 後學剛庵宋成鏞謹書(후학강암송성용근서)

내삼문에서 바라본 선화당(宣化堂, 관찰사가 업무를 처리하던 곳)의 모습

전라감영의 중심 건물은 전라감사의 집무실인 선화당(宣化堂)이다.

그리고 가석(嘉石)과 폐석(肺石)의 모습이 보인다.

가석(嘉石)은 섬돌 아래 왼쪽(동편)에 설치하여 죄인들로 하여금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 표석이고,

폐석(肺石)은 오른쪽(서편)에 설치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억울함을 하소연하게 하는 신문고 같은 표석이다.

가석과 폐석은 감영의 사법적 기능을 보여주는 것으로, 감사로 하여금 백성들을 덕으로 교화하여 깨우치게 하고

재판을 공정히 하여 억울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법을 다루는 형조의 섬돌 아래에도 가석과 페석이 있다.

주례(周禮)에 따르면, 가석은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돌로 잘못을 저지른 자들이 이를 보고 뉘우치고,

폐석은 붉은 돌로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이 돌 옆에 서 있으면 억울한 일을 해결해 준다고 하였다.

벽돌모양의 검은 돌인 사진 오른쪽의 돌이 가석(嘉石)이고

뾰족한 기둥 모양의 사진 왼쪽의 돌이 폐석(肺石)이다.

선화당이라는 당호는 "왕명을 받들어 교화를 펼친다"는 "승류선화(承流宣化)"에서 나온 말이다.

上德而下民(상덕이하민) "임금이 덕을 베풂으로써 백성을 교화한다."

비장청(裨將廳)은 전라감사의 사적 보좌관인 비장들의 집무소이다.

비장은 그 업무상 감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비장청은 감사의 영역과 가깝게 배치되었다.

<완산부지도>에 비장청은 감영의 내아 평면과 유사한 'ㄷ'자형으로 그려져 있다.

발굴조사 결과 비장청과 관련된 적심시설이 남아 있지 않아 복원하지 않고 터만 표기하였다.

선화당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그 이듬해 1598년 전라감사 황신(黃愼)이 중건하였으며,

1771년에 전라감사 윤동승(尹東昇)이 개건하였다.

이후 1792년(정조 16)에 화재로 소실되어 전라감사 정민시(鄭民始)가 다시 중건하였다.

선화당은 광복후까지도 남아 있었으나 한국전쟁 중 1951년 경찰청 무기로로 쓰이던 도청 문서고에서 로케트탄이 폭발하여도청 본관과 함께 소실되었다.

선화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로 약 78평에 달하는 큰 건물이며, 전주부성내에서 객사 다음으로 컸다.

전라감영의 중심에 선화당이 있고 선화당 동쪽에는 감영 누각인 관풍각이, 뒤쪽으로는 내아와 연신당이 있다.

선화당 앞쪽에는 내삼문과 비장청이 있다.

이밖에 감사 심부름꾼인 통인들의 대기소인 통인청, 약재를 다루는 심약당, 법률을 다루는 검률당, 한지를 만드는 지소,

책을 출간하는 인출방 등이 선화당 주변에 배치돼 있었다.

아전들의 근무처인 영리청과 작청, 진상품 부채를 만드는 선자청도 있었다.

상석에 앉아 기념사진을 한 방 남기고...

조선시대 지방통치체제는 8도와 도 아래에 주, 부, 군, 현 등으로 편성되었다.

도에는 감사(관찰사), 그 아래의 군현에는 수령이 파견되어 지방통치행정을 수행하였다.

수령은 군형의 대소에 따라 주에는 부윤, 대도호부에는 대도호부사, 목에는 목사, 도호부에는 도호부사,

군에는 군수, 현에는 현령, 현감이 각각 임용되었다.

조선건국 후 전라도는 제주도 3개 군현을 포함해 총 57개 군현이었으나, 1660년에 진원현이 장성부에 편입되어

조선후기에는 전라도가 총 56개 군현으로 편제되었다.전라감사(관찰사)는 종2품의 관리로 오늘날 도지사에 해당된다.

조선시대 육조판서가 정2품이고, 그 아래 육조참판이 종2품이므로감사(관찰사)는 직급 상으로 참판급이다.

하지만 직급상 드러할 뿐, 행정 군사 사법을 총괄하는 막대한 권한의 소유자였다.

군현 수령의 불법을 규찰하고 성적을 평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내의 모든 민정 군정 등의 통치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래서 감사의 임기를 1년 또는 2년으로 짧게 하여 그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견제하였다.

전라감사는 전주부윤과 직급이 같았다. 즉 전주부윤도 전라감사처럼 종2품직이었다.

조선전기에는 대체로 감사와 부윤이 따로 임명되었지만,임진왜란 후에는 주로 겸직제로 운영되었다.

전라감사가 전주부윤을 겸할 경우 감사가 전주부의 실무들까지 일일이 다 챙겨볼 수 없으므로

종5품의 판관이 파견되어 실질적인 전주부윤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측우기는 비가 내린 양을 측정하는 기구로 세종 때 처음 만들었다.

각 도의 감영과 군현에 측우기를 설치하여 강우량을 재고 농사에 활용하였다.

이 측우기는 충청감영에서 사용했던 측우기를 재현한 것이다.

측우기를 받치고 있는 측우대는 경상감영의 것을 본떠 만들었다.

1928년 및 1937년 일제강점기 도청사 도면에 표기된 우물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우물의 평면은 원형이며, 20~30cm 내외의 석재로 쌓아올렸다.

우물의 규모는 직경 150cm 내외로 확인되었다.

감영 누각인 관풍각에 올라가 본다.

관풍각 천정 상량문(上樑文)

"서기 2018년 7월 25일 복원상량"

관풍각(觀風閣)은 선화당에 이어 감사(관찰사)가 정무를 처리하는 제2의 정청이며,

감사가 쉬기도 하고 연회의 장소로도 사용했다.

관풍각이라는 이름은 감사의 직무인 "풍속과 민정을 살핀다"는 "관풍찰속(觀風察俗)"에서 유래하였다.

선화당과 관풍각 당호는 감사의 직무를 상징적이고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왜 관풍루와 관풍각으로 달리 부르는 것일까?

실은 용도의 차이다.여흥공간의 의미일때 보통 루를 붙이고...

거주공간의 의미일때 보통 각을 붙인다.

전주는 출판의 도시였다.

전라감영에서 출판된 책은 완영본(完營本), 인쇄를 하기 위해 판각한 목판을 완영책판(完營冊板)이라 했다.

 

전주는 부채의 고장이다.

전주부채는 단오날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으로 전라감영에 선자청을 두고 부채를 제작 관리하였다.

전주고지도에서 보면 전라감영 안에 선자청이 매우 크게 자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주에서 최고의 부채가 생산되었던 것은 질 좋은 한지가 이곳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전주는 또한 소리의 고장이다.

전주는 소리꾼들이 모이고, 실력을 뽐내고, 평가받는 곳이었따.

판소리 최고의 등용문인 전주 대사슴놀이는

조선후기 전라감영과 전주부영의 통인들이 동짓날 밤 소리꾼들을 불러 경영을 펼쳤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통인은 전라감사와 전주부윤의 심부름을 담당하는 자들이다.

선정비(善政碑)란 선정을 베푼 관리들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그렇지만 조선말에는 선정비들이 으레 세워졌고 억지로 세워지기도 하였다.

조선말에는 전라감영 건너편에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가 다가공원쪽으로 옮겨졌으며,

2020년 감영을 복원하면서 감영 경내로 이전하였다.

관찰사 18기, 판관 5기, 중영장 별장 영의정 암행어사 각 1기로 총 27기의 선정비가 있다.

연신당  연신당(燕申堂)은 전라감사의 처소이다.

1688년(숙종 14)에 전라감사 이유(李濡)가 창건하였다.

연신당이라는 이름은 『논어』「술이편」에

‘공자께서 집에서 쉬고 계실 때는, 마음이 온화하고 너그럽고 즐거우신 듯 보였다'에서 나온 것이다.

子之燕居 申申如也 夭夭如也

감사(관찰사)가 편히 쉬는 처소임을 의미한다.

경상감영은 징청각(澄淸閣)이라고 하였다.

연신당에서 내아와 행랑으로 이동할 수 있는 협문이 보인다.

행랑쪽 어떤 방 안에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다.

전주 전라감영의 1차로 복원된 건물들을 모두 둘러보고 다시 선화당쪽으로 해서 밖으로 나간다.

전라감영의 완전복원과 전주부성 복원을 통해 전주의 지난 천년을 전주의 현재와 미래를 잇는 뜻깊은 계기가 되길 기원한다.

전라감영 회화나무의 모습이다. 회화나무는 흔히 '선비나무', '학자수'라고 부른다.

나무 가지가 선비의 기상처럼 거침없이 자유롭게 뻗어나기 때문이다.

이 회화나무는 수명이 150 여년이 된 나무로 현존하는 전라감영의 유일한 흔적이다.

구 도청사 건물 철거 전에 회화나무가 의회동 건물에 둘러싸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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