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섬투어로 시작한 북유럽 여행기


2018.6.27  8편 노르웨이 오슬로 바이킹 박물관 시청사 왕궁 칼요한스거리



오슬로 최고의 관광지 비그되이(Bygdøy) 지구에 자리한 박물관이다. 바이킹에 관한 방대한 자료가 전시돼 있다. 많은 전시품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피오르에서 발굴한 3척의 선박과 그 안에서 발견된 수장품이다. 이는 장례를 치르기 위해 수장한 선박으로 바이킹 무덤에서 발견됐다. 바이킹 시대에는 장례를 치를 때 여러 소품과 음식, 동물까지 함께 묻는 풍습이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여러 수장품이 잘 보존된 상태로 전시돼 있다. 3척의 선박 이름은 각각 오세베르크(Oseberg), 고크스타드(Gokstad), 투네(Tune)다. 오세베르크는 이집트 여왕의 선박으로 1904년에 발견됐다. 선체가 무척 아름다운 고크스타드(Gokstad)는 900년대에 건조된 선박으로 추정된다.




비그되이섬에 위치한 바이킹 박물관 해양 박물관 콘티키 박물관 등 5개의 박물관이 모여 있다

바이킹 옹션의 고향 2개의 1100년도 된 비이킹 배는 잘 보존 해골이 있는 바이킹 매장도 있다


바다를 건너 첫번째 도착하는 바이킹 박물관 뷔그되위 지구는 19세기말까지 일개 섬에 불과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노르웨이의 문화와 노르웨이 사람들의 용맹스런 탐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박물관이 세워지면서 모험을 즐기고 자립심과 독립심을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하는 북유럽 가치관은 바로 바이킹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니 극한의 환경에서 생존하였던 바이킹의 역사와 노르웨이 사람들의 탐험 정신을 느끼기 위해 여행객들이 몰려온다고



투네호는 원형이 많이 파손 되어 발견된 바이킹의 배

바이킹의 침략 행위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본능이었을 것이다


바이킹 박물관

바이킹 박물관에는 오슬로 피오르 부근에서 발굴된 바이킹 선박 오세비르그호 고크스타호 투네호등이 있다

그중에 보존 상태가 가장 졸은 오세베르그호가 가장 인기 좋다


바이킹선 박물관에는 노르웨이 바이킹들이 유럽 전역에서 약탈과 강탈을 일삼은 시대에 이용되던 선박이 세 척 전시되어 있습니다. 예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이 19세기 선박들은 1867년에서 1903년 사이에 발견되었는데, 발견 장소에 따라 이름이 붙쳐졌다

오세베르그 호

길이 23 m 폭  5 m 가 주는 크기의 웅장함도 있지만 9세기에 만들어 졌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외관



귀족들은 재산을 무덤까지 가져갔는데, 이러한 유물 중 대다수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귀족들의 침대와 썰매, 의복, 연장, 요리 도구등 나무로 만든 마차에서 옛 바이킹의 전설을 묘사한 장면도 감상할수 있다


피오르드에서 발견된 3척의 바이킹 선박들과 그 안에서 나온 보석 등을 전시하는 박물관.

834년 축조되어 이집트 여왕의 선박이었던 오세베르크, 선체의 곡선이 아름다운 900년대 선박 고크스타드호를 볼 수 있다오슬로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그 기원은 1050년, 노르웨이 최후의 바이킹왕, 하랄 하르드로데부터 시작된다1066년 영국 원정 전쟁에서 하랄왕이 전사하자 이를 계기로 약 200년간 지속되던 바이킹의 활동도 종지부를 찍게 된다.박물관 입구에는 1904년에 발굴된 바이킹 선박 오세베르크가 놓여 있다.

800년대부터 50여년간 여왕 전용 선박으로 활약하다 여왕이 사망하자 여왕의 무덤으로 유해와 함께 매장되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세베르크의 왼쪽으로는 900년대에 활약했던 아름다운 조형미의 고크슈타트호가 있으며
그 외에도 바이킹들이 사용했던 물건들과 의상들, 그리고 바이킹이 활약했던 루트 등을 보기 쉽게 전시해 놓았다


아름다운 조각으로 장식된 오세베르그호는  이집트 오사 여왕의 관으로 9세기에 매장된것

오세베르그호에서는 각종 장식품 및 부엌용품과 가구류가 발견되었다
배 밑바닥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대부분 부패된 채 발견되었는데 원거리 항해용으로 이용된 것보인다
 


바이킹선들이 1,000년 이상의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까닭은 배 아래에 바이킹 족장을 묻었기 때문입니다.

족장들이 사후 세계에서도 보호받을 수 있도록 바이킹들은 다량의 진흙으로 배 위를 덮어 목재가 부식되지 않도록 막았답니다


아름다운 조각으로 장식된 오세베르그호는 오사 여왕의 관으로 9세기에 매장된 것이다.
오세베르그호에서는 각종 장식품 및 부엌용품과 가구류가 발견되었다

천장과 벽면에 스크린으로 바이킹 배들이 어떻게 쓰였는지 바이킹들이 배를 타고 약탈하며  용감함과 다니면서 사냥하는 모습이노르웨이  역사 속으로 빠져들게 과거 모습과 힘든 상황을 잘 어우러지게 영상을 실감나게


용 조각상과 뱀 머리를 비롯한 오세베르그(Oseberg)호의 동물 장식.

이 배의 장식은 몹시 정교해서 귀족들의 예식을 거행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이킹 박물관



시의 900주년에 맞춰 준공된 시청사(Radhuset)는 오슬로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공사 계획과 착공은 1920년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완공된 것은 1950년의 일이다. 낭만주의와 고전주의가 적절히 결합된 아름다운 외관을 지녔다. 두 개의 탑을 가진 시청사의 내부는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예술품들로 가득 장식되어있다. 매년 12월이면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는데, 2000년에는 우리나라의 김대중 대통령이 이곳에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오슬로 시청사 여기서 노벨평화상을 시상한대요 김대중 대통령도 여기서 상을 받았답니다

오슬로 여행의 시작은 시청사(Oslo City Hall)의 뒤에 있는 광장으로부터 시작된다. 오늘 둘러보게 될 시청사는 물론이고 도심(都心)이라 할 수 있는 칼 요한슨 거리(Karl Johans gate)’도 이곳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오슬로가 시작된 아케르스후스 요새(Akershus Fortress)’5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중앙의 한복판에 오슬로의 상징인 백조 두 마리로 분수(噴水)를 만들어놓았다. 조각가인 ‘Dyre Vaa(1903~1980)’가 만들었다. 노르웨이 소설가 한스 에른스트 칭크(Hans Ernst Kinck 1865~1926)’백조를 '오슬로의 영혼'으로 묘사한 이래 백조는 오슬로의 여러 조형물에 즐겨 쓰는 소재가 되었다. 청사의 정면 상단에 매달린 조각상(彫刻像)‘Joseph Grimeland(1916~2002)’라는 조각가의 '오슬로 소녀(Oslopike)'라는 작품이라고 한다. 오른편 벽면에는 지름 5미터짜리 천문시계가 붙어 있다. 태양이 운행하는 궤도를 12 성좌로 나눈 황도 12, 서양식 12간지라고 할 수 있는 조디악(12궁도)들이 빙 둘러 있는데, 조각가 ‘Nils Flakstad(1907~1979)’의 부조 작품이란다. 시청사 안팎을 장식하고 있는 이러한 조각과 벽화들은 화가 8명과 조각가 17명이 만든 작품들이다.

오슬로 국립극장

거리로 들어서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건물은 국립극장(Oslo Nationaltheatret)이다. 19세기 말 노르웨이가 스웨덴으로부터 분리·독립하면서 노르웨이 극작가들과 예술가들의 염원을 담아 1899년 문을 열었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극적인 예술 공연을 펼치는 곳으로 유명하다. 극장 앞 좌측에는 헨리크 입센(Ibsen, Henrik Johan, 1828-1906)’의 동상(銅像)이 세워져 있고, 오른쪽은 노르웨이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초대 극장장인 비에 른손(BjØrnson, BjØrnstjerne, 1832-1910)’의 동상이 지키고 있다. 또한 건물 정면에는 대표적인 노르웨이 출신 극작가인 루드비 홀베르(Ludvig Holberg, 1684-1754)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광장 한쪽에 노르웨이 출신의 작곡가인 할보르센(Johan Halvorsen, 1864-1935)의 동상도 보인다. 베르겐 필하모닉의 수석연주자를 거쳐 1893년부터 지휘자로 활동했다. 1899년 개장한 국립극장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임명되었고 1929년 은퇴할 때까지 30여 년 동안 지휘자로 활동했다. 이 기간 동안 30여 개의 오페라를 지휘했고 또한 30여 개의 무대음악을 작곡하였다. 은퇴 후에는 마지막 음악적 정열을 집중시켜 세 개의 교향곡과 두 개의 노르웨이 광시곡을 작곡하였다. 할보르센은 그리그가 수립한 노르웨이 민족음악을 발전시켰으나, 그리그와는 확실하게 구분되는 스타일로 작곡하였다. 그리그의 여러 개의 피아노곡을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하였는데, 그 중 하나를 그리그의 장례식에서 연주하였다. 또한 헨델의 바이올린과 첼로 2중주곡을 편곡하여 파사칼리아를 작곡하였다.





거리의 동쪽 끄트머리쯤에 있는 오슬로 대성당(Oslo domkirke)이다. 노르웨이의 국교인 루터파 교회의 총본산일 뿐만 아니라 3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건축물이다. 1624년 대화재로 불타 버린 도시를 다시 재건하면서 대성당도 함께 건립되었다. 하지만 1686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1694년 다시 짓기 시작해서 1699년에 청록색 탑이 있는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이후 150여 년 동안 시 안에 있는 유일한 성당으로 종교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현재는 3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시의 상징물이 되었다. 1936년부터 1950년 사이에 제작된 천장의 화려한 벽화와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조각가 비겔란(Vigeland)의 작품인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놓치지 많아야 할 볼거리이다.

칼 요한슨 거리는 서울의 명동만큼이나 하루 종일 인파로 북적이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카페나 상가가 밀집해 있음은 물론이다. 명색이 유명한 관광지인데 노점상이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 길바닥에다 좌판을 벌여놓고 기념품이나 민속공예품 같은 것을 파는 사람들도 보인다. 생김새로 보아 남미계 이민자들이 아닐까 싶다. 모금함을 앞에 놓고 각종 악기들로 연주를 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잔디밭으로 된 정원의 너머에는 국회 의사당이 있다. 반원형 의사당을 가운데에 두고 양쪽으로 날개를 펼친 모양새이다. 스웨덴의 건축가 에밀 빅토르 랑글레트(1824~1898)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신고전 양식을 섞어 설계했다고 한다.노르웨이에서 주관하고 있는 노벨 평화상의 초기(1901-1904) 시상식(施賞式)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이 행사장은 노르웨이 노벨협회(1905-1946)’로 옮겨졌다가 오슬로대 법학부(1947-1989)’를 거쳐 1990년부터는 오슬로 시청에서 거행되고 있다.

노벨상 수상자들이 묵는다는 그랜드호텔이다. 우리나라의 김대중 대통령도 이곳에서 묵었음은 물론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평화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절실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피상적인 개념보다 노벨평화상의 현장에서 진정한 평화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칼스요한거리에 꽃나무를 싴는 아가씨 인부들


시청을 둘러본 다음에는 칼 요한슨 거리(Karl Johans Gate)’로 향한다. 중앙역에서 시작해 왕궁까지 오슬로의 중심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약 1.3쯤 되는 구간으로 오슬로 최대의 번화가이다. 이 거리의 끝 언덕 위에다 왕궁을 건립한 칼 요한왕의 이름에서 이름을 따왔다. 시청 앞에서도 곧바로 연결되는 이 거리는 상점과 레스토랑이 즐비하며 거리의 중심에는 국회의사당이 있다. 이번 투어는 칼 요한슨 거리를 따라 걷다가 만나게 되는 사연이 있는 건물들의 외관(外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 짜여있을 따름이다. 타이트하게 짜인 일정에 쫓겨야만 하는 패키지여행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칼스요한 대학건물

왕궁으로 가는길

왕궁 전경

거리 끝의 언덕에 있는 왕궁(The Royal Palace of Norway)은 현재 노르웨이 국왕이 기거하고 있는 공식 저택이다. ’카를 14가 지었는데 화려하기보단 소박한 모습이다. 왕궁 내부는 출입할 수 없지만 왕궁 외부와 주변 정원은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어, 봄과 여름철에는 녹음 속에서 일광욕을 즐기려는 오슬로 시민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왕궁을 지키는 근위병들의 교대식도 볼거리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나폴레옹의 전사이자, 원래 이름이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Jean Baptiste Bernadotte)‘인 칼 요한은 1818년 당시 스웨덴 왕인 동시에 노르웨이를 지배했던 왕이었다.


노르웨이 국왕 하랄5세가 살고있는 왕궁의 외관을 둘러 보았다.


왕궁 경비원과 함께


경비 가 총을 바꾼자세로 사진을 찍게 한다 인정샷

왕궁 잔디밭


왕궁 잔디밭에 엄마는 일광욕을 아빠는 아기를 돌보고 있네

일광욕을 하는 주부 아기는 아빠에게


왕궁에 관광온 여행객 표정이 아름답다




신혼부부도 결혼식 끝난후

청사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까지 툭 트인 메인홀(main hall)이 나온다. 가로 31m, 세로 39m에 높이가 21m인 이 공간은 노벨상의 만찬이 열리는 스톡홀름 시청의 블루홀을 벤치마킹했다고 한다. 한쪽에 계단을 놓아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한 구조도 같다. 다만 스톡홀름의 블루홀은 벽돌 벽을 그대로 노출시킨 데 반해, 이곳은 빙 둘러 벽화로 장식한 점이 다르다. 메인홀과 이층 연회실, 그리고 이층 복도의 벽화들은 '벽화 형제들'로 불리던 세 명의 화가( Axel Revold, Alf Rolfsen, Per Krohg)헨릭 쇠렌센(Henrik Sørensen)’이 맡았다고 한다. 벽화에는 노르웨이 사람들의 일상생활, 바이킹 신화, 문화와 역사 등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점령으로 인한 어두운 역사도 잘 표현되어 있다

시청사안 에술 작품도 있고

시청사 내부에는 기록화 같은 벽화가 여러작가에 의해 그려졌는데 그 기법 또한 다양하게 그려져 규묘가 어마어마하게 웅장하다  이곳에서는 다른 나라의 귀빈 영접을 비롯한 다양한 국내외 행사가 열리는데, 특히 1990년부터 노벨 기일인 1210일마다 노벨 평화상을 주는 시상식장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우리네 귓가엔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 자만 맴돌 따름이다. 김대중전대통령이 이곳에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노벨은 스웨덴 사람이다. 하지만 노르웨이에서 오래 살았다고 한다. 그의 이름으로 수여되는 노벨상 가운데 평화상을 이곳에서 수여하게 된 이유이다. 평화상만은 노르웨이에서 수여하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매년 1210일에 시청사에서 상을 수여해오고 있다.


노르웨이의 유명한 미술가들이 헌정한 작품들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어 많은 볼거리를 가지고 있다. 연회장도 있고   관람 동선(動線)은 스톡홀름 시청 블루홀처럼 메인홀 한쪽에 놓은 계단을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이층으로 오르면 메인홀의 베란다로 연결된다. 스톡홀름 시청처럼 이층 복도를 따라 가면서 방들을 구경하는 구조이다. 이곳에서 눈여겨봐야 할 곳은 남서쪽 모퉁이에 있는 작은 방이다. 시민들의 결혼식 장소로 쓰이는 공간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뭉크(Munch)의 대형 작품이 걸려 있어 더 유명해졌다. 이 방에 걸려있는 '(Life)'이란 작품은 ‘2차 세계대전때 노르웨이를 점령했던 나치가 약탈해 갔던 것을 전쟁 후에 돌려받은 것이라고 한다.

사방의 벽에는 노르웨이의 일상 생활과 문화를 담은 거대한 유화들이 걸려 있다.

노르웨이의 유명한 미술가들이 헌정한 작품들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어 많은 볼거리를 가지고 있다.

오슬로시는 인구는 51만정도이고 스카게라크 해협으로부터 약 100km나 만입한 오슬로 피오르드 깊숙이 있으며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오슬로는 노르웨이의 정치 문화 상공업의 중심지며 부동항으로 노르웨이의 수도이다.



주방기구들을 진열해놓은 공간도 보인다. 노벨상 행사 때 사용되는 집기들인 모양인데 은()으로 만든 제품들 일색이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는 섬세하면서 아름답기 짝이 없다.


기념품을 전시하는 공간을 살펴보다가 화들짝 놀라고 만다. 우리나라의 거북선도 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전통의상을 입은 인형과 중국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방패, 회교사원인 모스크(mosque)의 모형들 사이에서 의젓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시청이 완성된 기념으로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선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거북선을 보냈다고 한다. 


시청사는 오슬로의 상징으로 시 창립 900년을 기념하여 1931년에 착공하였으나 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었다가 1950년도에 준공되었다고 한다.




 건물 1층과 2층에는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거대한 유화와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예술가 뭉크(Munch)의 '생명'이라는 작품을 비롯해서 수 많은 벽화와 그림이 있다.


오슬로 시청사-노벨 평화상 수상식을 이곳에서 수여하는데 12월 10일날 한다. 



연회장으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남쪽 '축제의 회랑(Festival Gallery)'이다. 천장은 전통 바이킹 문양으로 장식했고 왼쪽 벽엔 화가이자 직물염색가 코레 미켈센 욘스보르그(Kåre Mikkelsen Jonsborg 1912~1977)’8세기 오슬로 시장 풍경을 묘사한 벽걸이 직물, 태피스트리(tapestry)들이 걸려 있다. 연회장 쪽으로 통하는 문의 벽면에 가득한 그림은 악셀 레볼(Axel Revold 1887~1962)’의 작품으로 노르웨이의 울창한 삼림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입체파 기법으로 그린 것이라고 한다.


 벽화에는 노르웨이 사람들의 일상 생활, 바이킹 신화, 문화와 역사 등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복도의 곳곳에는 유명 인사들의 흉상(胸像)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벽면에는 도자기로 만든 부조들이 결려 있다. 제작한 사람의 약력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 생각은 나지 않는다.

시청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연회장이다. 왼쪽 벽엔 1905년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의 왕인 호쿤 7울라브 5’, 그리고 현재의 왕인 하랄 5세와 소냐 왕비의 전신 초상화가 걸려 있다.

전면에는 윌리 미델파르트(Willi Midelfart 1904~1975)’가 그린 '성장(Growth)'이라는 작품이 그려져 있다. 누드 비치에서 벌거벗고 노는 남녀노소들을 그렸는데, 계급 없는 세상과 사회주의 이상향을 상징한단다. 벽화의 아래에는 연회장의 음식을 나르는 두 개의 문()이 나있다. 이 문과 벽화에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벽화는 원래 일층 중앙홀에 쓰려다가 너무 분방한 소재여서 이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옮기려고 하니 문이 벽화를 잘라 먹어 버리더라는 것이다. 그림을 보면 문을 가리키며 메롱 하는 꼬마가 그려져 있다. 짜증이 난 화가가 일부러 그려 넣은 것이란다.

 오슬로의 시청사는 오슬로 창립 900주년을 기념하여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로 1931년에 착공하였으나 세계 2차대전으로 중단되었다가 1950년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뒤에 보이는 그림이 "뭉크"-생명- 작품이다.

 오슬로의 시청사는 오슬로 창립 900주년을 기념하여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로 1931년에 착공하였으나 세계 2차대전으로 중단되었다가 1950년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뒤에 보이는 그림이 "뭉크"-생명- 작품이다.






오슬로 시청사 건물 앞 뜰에는 비겔란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오슬로 국립미술관(Oslo National Gallery)이다. 노르웨이 최대의 미술관으로 1836년에 개관하였다. 피카소, 르누아르, 세잔, 마네, 모딜리아니, 드가, 뭉크 등 거장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또한 노르웨이 작가의 작품과 19~20세기 덴마크·핀란드 화가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있는 전시관은 사춘기‘, ’절규58점의 뭉크(Edvard Munch,1863-1944)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뭉크관이다. 만일 뭉크의 더 많은 작품을 감상하고 싶다면 국립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뭉크 미술관을 함께 둘러볼 것을 권한다.

이곳은 옵션 30유로

오슬로 국립미술관

[ 뭉크의 절규” ]

2012년 뉴욕의 소더비 경매에서 당시 최고가인 1,358억원에 낙찰되었던 에드바르 뭉크의 파스텔화 "절규"의 진품이 전시되어 있다.

<절규>는 뭉크가 생의 공포라고 부르던 것을 표현한 것으로 실존의 고통을 형상화한 초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온통 핏빛으로 물든 하늘과 이와 대조를 이루는 검푸른 해안선, 동요하는 감정을 따라 굽이치는 곡선과 날카로운 직선의 병치, 그리고 극도의 불안감으로 온몸을 떨며 절규하는 한 남자, 이 남자의 절규는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과 고통에 대한 울부짖음이고, 뭉크는 이를 입 밖으로 표출시켰다. 같은 주제를 그린 소묘 작품에는 뭉크의 다음과 같은 글이 덧붙여 있다. "두 친구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처럼 붉어졌고 나는 한 줄기 우울을 느꼈다. 친구들은 저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나만이 공포에 떨며 홀로 서 있었다. 마치 강력하고 무한한 절규가 대자연을 가로질러가는 것 같았다."



오슬로박물관 뭉크의 절규

오슬로박물관 피카소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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