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4.9 중남미 여행기 10편 페루 쿠스코
2019.3.19~2019.4.9 22일간의 중남미 여행기 10편
페루 쿠스코
가이드 박경숙사장(꼬꼬투어) T 51-444-4011-2 HP 51-976-170-652
페루 쿠스코 2019.3.28 여행10일째
리마에서 비행기로 1시간30분 페루 남동쪽 안데스 산맥에 있는 고산도시 해발3400m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 사람이 고산증을 느끼는 고도 3000m를 훨씬 높은 도시
쿠스코 비행기장에 내리자 마자 숨쉬가 힘들다 가이드가 고산증약을 먹지 말라고 한다.
일단 견디보고 도저히 못참으면 약을 먹으라고 그러나 움직임이 점점 둔해지는 것은 어찌할수 없다.
우선 점심을 먹고 잉카인들이 태양신전 코리칸차 위에 스페인 정복지들이 세운 산토도밍고 성당.
페루 쿠스코 지역의 돌로만든 정교한 방어요새 삭사이와만.1번째
잉카제국의 제레장이였던 켄코유적 2번째
성스러운샘이 흐르는 잉카제국의 목욕탕이였던 탐보마차이 3번째
쿠스코 북쪽을 지키기 위한 요새였던 푸카푸카라 4번째 을 둘러본다
16세기까지만 해도 페루는 동쪽으로 아마존, 서쪽으로 태평양, 남쪽으로 칠레, 북으로는 에콰도르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의 잉카 제국이었으며 그 중심에 쿠스코가 자리 잡고 있었다. 호전적이던 잉카인들은 타 부족의 족장을 잔인하게 죽이는 방식으로 영토를 넓혀 나갔으며, 그 결과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는 인구 20만 명이 넘는 도시로 성장했고 잉카 로드를 중심으로 수많은 유적을 남겼다. 그러나 오늘날 쿠스코는 잉카의 고도(古都)라기보다 유럽풍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스페인의 도시에 더 가깝다. 자신들의 문화를 이식하고자 했던 스페인의 파괴 행태로 잉카 신전과 건축물 대신 광장과 대성당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유심히 보면 그들이 완전히 지우지 못한 잉카 제국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옛 명성을 전한다.
리마에서 비행기로 1시간30분 쿠스코도착
페루는 리마가 교통의 요지이다
쿠스코 상공에서 찍은 시내
쿠스코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해발 3,300m의 고산 도시이다. 그 덕에 지형상 자연적인 요새를 형성하고 우루밤바 강이 흐르는 비옥한 농경지를 확보할 수 있어 잉카 제국의 수도로 맞춤이었던 곳이다. 동시에 많은 여행자들이 고산병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곳이기도 하다. 잉카 제국의 옛 수도이자 스페인군이 가장 먼저 정복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건설했던 곳, 그리고 남아메리카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손꼽히는 마추픽추가 있는 도시인 쿠스코에서 희비가 엇갈렸던 옛 제국들의 자취를 느껴 보자.
세계에서 가장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문명의 하나인 잉카 문명의 중심지 쿠스코! 고도 3740미터 안데스 산맥의 고원에 있는 쿠스코에서 제일 먼저 잉카 문명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쿠스코의 중심지 아르마 광장입니다. 이곳에서는 스페인 식민 시대의 관청들과 성당들이 잉카의 주춧돌 위에서 그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쿠스코 공항
쿠스코 시내모습
쿠스코 시내모습
쿠스코 시내모습 엄마와 딸
여늬 시장과 마찬가지로 옷가게, 식품가게 등 생활용품들이 즐비하게 보인다.
상가옆 한쪽 귀퉁이에서 펴 놓은 노점 모습들에서 가난하나 억척스러움을 볼수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나 시장보러 나온 사람들이나 모두들 인디오 전통 의상들이다
잉카 제국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도시 쿠스코(Cusco), 케츄아어로 배꼽(또는 중앙)을 의미하는 꾸스코는 3,400m의 안데스 분지에 자리잡고 있는 인구 26만 명의 도시로 잉카문명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는 남미 여행의 백미로 꼽히는 세계적인 관광도시이다.
전설에 의하면 태양신이 자신의 아들과 딸을 티티카카 호수에 내려보내며 황금 지팡이가 꽂히는 곳에 정착하라고 하는데 그들이 쿠스코에 지팡이를 박고 도시를 건설했다고 한다
1533년 피사로를 비롯한 에스파냐인들에게 정복되었으나, 번영의 절정기를 맞이하였던 당시의 쿠스코는 정연한 시가지, 아름다운 건물, 거대한 신전 등으로 정복자를 놀라게 하였다.
잉카인들은 하늘은 독수리, 땅은 퓨마, 땅속은 뱀이 지배한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정신세계를 반영하듯 꾸스꼬는 도시 전체가 퓨마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 머리부분에는 삭사이와만 유적지가 자리하고 있다.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만큼 과거의 흔적을 더듬어 보면 한때 1백만명이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주민의 대부분은 잉카의 자손인 인디오이다.
쿠스코의 건물들은 스페인풍의 건물등이 주류를 이루는데 잉카를 정복할 당시 스페인 사람들은 잉카의 건물들은 무너뜨리고 그 기초석 위에다가 스페인식의 건물을 지어놓았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건물의 밑부분은 잉카시대의 것들이다.
잉카시대의 건물들은 일반사람들도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데 돌을 쌓은 모양을 살펴보면 잉카의 벽돌들은 아주 정교하게 다듬어지고틈이 거의 없이 쌓아져 있다한다.
하지만 그 이후에 만들어진 벽들은 엉성하게 쌓여있거나 시멘트로 메워져 있어서 아주 조잡하게 보인다.
태양의 신전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는 해발 약 3,400m에 있는 고원 도시다. 쿠스코 거리에는 아직도 잉카 제국의 궁전·신전 등의 석조건조물의 일부가 여기저기 남아 있다. 쿠스코의 알마스 광장에는 황제의 궁전과 태양의 처녀 궁전이 서 있었는데, 지금도 두 신전의 돌벽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태양의 처녀란 나라 안에서 뽑은 미녀들로 잉카의 주신인 태양과 잉카 황제를 위하여 옥수수 술을 빚거나 호화로운 직물을 짰다. 그리고 태양 축제 때에는 잉카 황제 곁에서 제전의 조수 노릇도 했다. 또한 태양의 신전이 있었는데, 이 신전을 코리칸차(황금의 울타리라는 뜻)라 한다. 신전의 안쪽 벽은 두꺼운 금판으로 덮여 있었고, 분수와 정원도 금으로 만들어 졌으며, 그리고 태양의 신상도 금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태양의 신전의 금은 정복자인 에스파냐 인에게 모두 빼앗겼다.
태양의 신전 안에는 역시 견고한 벽으로 둘러싸인 여러 방들과 장식대가 있으며 안뜰에는 축제 때 술로 가득 채워졌다는 우물이 남아 있다. 이와 공존하는 산토 도밍고 교회는 동시대에 지어진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웅장한 바로크 양식에 내부는 아름다운 제단으로 꾸며져 있다. 한편 태양의 신전 터가 남아 있는 앞 광장에는 코리칸차 박물관(Museo de Sitio del Qoricancha)이 있는데 이곳에서 잉카 제국의 유물들과 외과 수술이 행해진 해골들을 볼 수 있다
태양의신전
태양의신전 도자기
태양의신전 방이 창문을 통해서 옆방까지
태양의 신전 안에는 역시 견고한 벽으로 둘러싸인 여러 방들과 장식대가 있으며
태양의신전
태양의신전
필자뒤가 태양의신전 우물
태양의신전 2층에는 조각품들과 미술품이
태양의신전 금으로 만든 당시문자
태양의신전 안내도
태양의 신전 안에는 역시 견고한 벽으로 둘러싸인 여러 방들과 장식대가 있으며
태양의신전 천체를 그림으로
태양의신전 2층에서 바라본 쿠스코 시내
태양의신전 2층 에서 인정샷을
태양의신전 실과 갈대로 만든 낚시 도구
"잉카"는 케추아어로 "태양의 아들"이란 뜻이다.
아득히 먼 옛날 유럽사람들이 그 존재를 알기 오래 전부터 아메리카 대륙은 아메리칸 원주민이 살던 땅이었다.
그들은 독자적인 문명 사회를 구축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생명을 존중하면서 살아왔다.
우리가 알고있는 「잉카문명」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잉카제국 이전에도 많은 문명들이 존재했으나 그들 문명과 잉카제국은
문자가 없었던 관계로 그들의 생활양식 따위에 관한 것들은 단정할 수는 없고,
단지 그들의 유물과 "잉카제국"을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의 기록과 잔해만 남은
"마추픽추"의 유적에서 그들의 화려한 문명을 짐작할 뿐이다.
태양의신전 2층 당시 사용되었던 창
태양의신전 당시사용된 항아리
태양의신전 당시 부족민들
태양의신전 2층 유물전시관
태양의신전 2층 유물전시관 물고기가 사람얼굴을 하고있다
도밍고 성당
알카파 새끼
태양의신전 앞 유물터
태양의신전앞 공원
쿠스코 길거리 풍경
아르마스 광장 정면 중앙에 위치한 대성당(Cathedral)은 잉카 제국의 '바라코챠'신전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이 성당 지붕에는 40km 떨어진 곳에서도 소리가 들리는 1659년에 제작된 남미에서 가장
큰 종이 있다.
대성당안에는 지진의 신으로 숭배하고 있는 갈색 살색의 예수상이 모셔져있다.라꼼파니아 데 헤수스 교회잉카 제국의 11대 황제 '와이나키팟쿠' 궁전 터에
세워진것이다.
지금 교회는 1650년대 대지진후에 재건, 쿠스코의 화가 마르코스 사파타가 그린
훌륭한 벽화와 멋진 제단이 유명하다
쿠스코의 중심지 아르마 광장입니다. 이곳에서 2층에서 점심 식사를하고
잉카가 대제국으로 존재했던 기간은 1세기 남짓한데 1430년대까지는 "쿠스코"계곡을 통치하던
지방왕국에 불과했지만 그 이후 정복을 거듭하다 안데스 지역에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1532년말 황금을 찾아 스페인에서 온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에 의해 이 "잉카제국"의
마지막 왕인 "아타왈빠" 왕은 화형선고를 받지만 화형대신 목이 잘린다는 조건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처형당함으로써 이 「잉카제국」은 종말을 맡게 된다.
아르마 광장에서본 산비탈 민가들
쿠스코 관광 현지가이드
유네스코 문화제 등록인정서
도밍고 성당 전경
12각의 돌이 박힌 잉카의 돌벽을 토대로 해서 세워진 종교 예술 박물관이나 잉카 제국의 황금 궁전 터에 세워진 산타도밍고 성당 말고도 많은 근대식 건물들이 잉카 유적의 흔적 위에 서 있답니다. 특히 산타도밍고 성당이 세워진 곳은 잉카 제국의 전성기 때 코리칸차 궁전의 터였어요. 당시 번영하던 잉카 제국의 상징이었던 이 궁전은 온통 금으로 덮여 있었다고 이렇게 금이 많다니!”
스페인 사람들은 그 금들을 모두 녹여서 스페인으로 가져갔습니다. 어찌나 금이 많았는지 유럽 경제가 혼란에 빠질 정도였지요. 산타도밍고 성당은 지진으로 그 모습이 사라졌지만 돌로 만든 잉카 제국의 건물 토대는 그대로 남아 있어 잉카 건축의 견고함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잉카는 안데스 산맥 원주민인 케추아족의 언어로 ‘태양의 아들’이란 뜻이에요. 그래서 잉카 인들은 그들의 창조주인 비라코차의 아들인 인티를 태양신으로 모셨어요. 태양신 인티는 지금 사는 세상, 즉 현세를 관장하는 신이에요. 안데스 산맥의 대지를 따뜻하게 품어 곡식을 맺게 해 주는 신이기에 잉카 농민들의 조상신이기도 하지요.
쿠스코의 중심지 아르마 광장입니다.
태양신을 숭배했던 잉카 인들은 마야나 아스텍 인들처럼 매일 지는 해를 에너지를 충전시켜 다시 떠오르도록 하기 위해서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을 바치는 의식을 치렀어요. 그런 의식을 통해 태양이 매일 다시 떠오르는 것이라고 믿었지요.
산도밍고 성당
신과 종교를 명분으로 내세워 파괴와 약탈을 서슴지 않았던 스페인 침략자들의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이 바로 태양의 신전과 산토 도밍고 교회라고 할 수 있다. 피사로와 스페인 군대가 처음 쿠스코에 왔을 때 태양이 반사되어 빛나는 황금의 신전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곧 신전의 안팎을 장식하고 있던 황금을 모두 약탈하고 신전을 부순 자리에 세운 것이 바로 산토 도밍고 교회이다. 너무 견고히 만들어져 부수는 것조차 힘들었다는 태양의 신전은 산토 도밍고 교회 앞에 남아 있는 거대한 신전의 터와 일부 돌담만이 남아 옛 모습을 추측하게 한다. 산토 도밍고 교회 바깥과 내부에 일부 남아 있는 돌담은 스페인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표면까지 정교히 다듬어져 물샐 틈 없이 쌓아 올려져 있으며, 1950년 지진이 일어났을 때 산토 도밍고 교회는 무너졌지만 돌담은 견실했다는 이야기는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이다.
태양의 신전 안에는 역시 견고한 벽으로 둘러싸인 여러 방들과 장식대가 있으며 안뜰에는 축제 때 술로 가득 채워졌다는 우물이 남아 있다. 이와 공존하는 산토 도밍고 교회는 동시대에 지어진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웅장한 바로크 양식에 내부는 아름다운 제단으로 꾸며져 있다. 한편 태양의 신전 터가 남아 있는 앞 광장에는 코리칸차 박물관(Museo de Sitio del Qoricancha)이 있는데 이곳에서 잉카 제국의 유물들과 외과 수술이 행해진 해골들을 볼 수 있다.
아르마스광장
잉카 인들은 마야 인들이 상형문자를 썼던 것과는 달리 문자 대신 아마우타라를 사용했어요. 이것은 사람들이 제사를 쓸 때 사용하는 기원문이나 후세에게 전해야 하는 전통 같은 것을 입에서 입으로 외워서 전해 기억하는 방법이에요.
여기 2층에서 점심식사를 식당
그리고 다른 보조 수단으로 퀴프라는 것을 썼지요. 잉카 문명의 산물인 퀴프는 한 가닥 끈에 여러 가닥의 끈을 직각으로 매단 것을 말해요. 잉카 인들은 그 퀴프의 색깔과 퀴프에 지어진 매듭의 숫자나 모양, 매듭이 지어진 위치 등으로 가구 수나 세금액 등을 계산했어요. 이를테면 ‘순수, 평화, 돈’은 하얀색, ‘황금, 태양, 영원’은 노란색, ‘피, 불꽃, 전쟁’은 빨간색으로 표시하는 식이었어요. 또 굵은 끈에 여러 가닥의 끈을 달아매어 다양한 숫자를 나타냈어요. 퀴프는 그래서 잉카 인들의 필수품이었어요. 잉카 제국이 멸망하고 난 뒤 유럽인들이 퀴프가 무엇인지 해독해 냈을 때, 그들의 인구나 가축, 가구 수를 계산한 것이 아주 정확해서 놀랐다고도 하지요.
아르마 광장에서본 산위의 빈민촌
그런데 무엇보다 잉카 인들이 현대인들을 궁금증에 빠뜨리게 한 것은 바로 건물을 만들기 위해 돌을 깎고 다듬는 석공 기술일 거예요. 잉카 인들은 금속으로 만든 도구를 사용하지도 않고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을 잘라 정확하게 쌓았어요
삭사이만 입장권
삭사이만 언덕위에 세워놓은 예수상
삭사이만 에서 바라본 쿠스코 시내모습
태양의 축제가 열리는 삭사이만-
페루 쿠스코 지역의 돌로만든 정교한 방어요새 삭사이와만.1번째
잉카 인의 세계관은 우주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천상과 지상, 그리고 지하다. 하늘은 독수리가, 지상은 퓨마가, 지하는 뱀이 제각각 상징물이다.
쿠스코가 지구의 중심이기에 이 도시를 퓨마로, 그리고 '삭사이와만'은 퓨마의 머리에 해당된다고 믿었다.
이 같은 세계관에 따라 유적 뒤쪽의 커다란 자연석 아래에는 쿠스코 중심인 대성당에 이르는 미로가 연결됐다고 여겼다.
석 벽 앞에는 넓은 잔디밭을 조성했고, 이곳에서는 매년 6월 24일 '태양의 축제(Inti Raimi)'가 열려 잉카시대 의식을 재현한다.
이 축제는 브라질 '리오 카니발'과 볼리비아의 '오르로'와 함께 남미대륙 3대 축제행사의 하나로 꼽힌다
해발 3600m 고지라서 고산증이 오는바람에 힘들어서 들어누웠다.
"독수리여 날개를 펄럭이라"는 뜻을 지닌 삭사이와만, 푸마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삭사이와만은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를 방어하는 성으로 만든 요새이다.
삭사이와만의 건축은 제 9대 황제 파차쿠티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거석을 3층으로 쌓아올려서 만든 돌벽은 22회의 구불구불함(지그재그)을 그리면서 360m에 걸쳐서 이어진다 .
석조 기술은 잉카의 석조처럼 빈틈없으며 돌의 표면은 둥그스름하게 다듬었고 돌과 돌 사이는 완전히 밀착되어 있다.
내부에는 석탑, 황제의 거소, 일반가옥, 병사, 무기나 식량의 창고, 저수조 등이 있고 곳곳을 연결시키는 지하도가 있다.
또 정상에는 거대한 해시계를 설치했다. 당시 주요 농작물이던 감자, 옥수수의 재배나 수확시기를 가늠하기 위한 시계라는 것이다.
사용한돌은 근교의 것뿐만 아니라 멀리 올란타이탐보에서도 운반 하루에 3만명을 동원하여
약 80년이 걸려서 제10대 황제 잉카유팡키가 축조하였다 한다.
쿠스코는 해발 3,400m의 분지라 그런지 걸어다니는데도 숨이 찬다.
삭사이와만에 오르는 길은 더욱 숨이 차는것 같아 자주 쉬며 올라간다.
푸노, 티티카카, 그리고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고도 3,800~4,200m) 까지는
점차 고도가 높아지니 몸도 서서히 고도에 적응될것 같다.
사진 몇장 찍고 들어눕고 고산증은 힘들어 결국 1~3번까지는 유적지를 둘러보았으나
더높은 곳에 있는 푸카푸카라 요새는 완정히 포기하고 가보지도 못했다.
모두들 고산증에다가 힘들어 휴식을
알카파와 페루여인들
알파카
알카파와 페우여인들 사진을 같이 찍고 1달러씩
잉카제국 제레장가는 곳 입장권확인
잉카제국의 제레장이였던 켄코유적 2번째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제레대
켄코유적에서본 쿠스코 시내
성스러운샘이 흐르는 잉카제국의 목욕탕이였던 탐보마차이 3번째
알카파와 여인
쿠스코 북쪽을 지키기 위한 요새였던 푸카푸카라 4번째 입구
중남미 여행 11번째 페루 우르밤바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