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후기 1편

2018.7.01 17편 러시아 상트페테부르크 넵스킨대로 황금첨탑

차세대2 2018. 7. 18. 21:48

보물섬투어로 시작한 북유럽여행기


2018.7.01  17편 러시아 상트페테부르크 넵스킨대로 황금첨탑


넵스킨대로

넵스킨대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이 되는 메인대로로씨궁전 광장에서 시작하여 알랙산드르 넵스키 성당까지연결되는 최대의 번화 거리입니다

수많은 인파가 몰리는 인기 거리를 반영하듯 백화점 극장 레스토랑 호탤 등 뿐만 아니라 길거리의 예술가들가 화가등 다양한 문화인들을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중간에 카진 성당과 주요 관광지로 이동이 용이하며 네바강의 거리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네바강 유람선을 타기 위해이동 길가에는 자작나무 숲이 울창


고속도로 톨게이트

호텔에서 바라본 정교회

저녁을 먹고 시내 카페에서 맥주한잔



상트페테르부르크 배수진 가이드와 함께

호텔에서 바라본 야경

오늘하루 같이할 가이드 배수진


버스를타고 가며 찍은 시내


넵스킨대로 신호등이 공중에



지하철역


카잔성당

카잔성당

넵스킨대로

인공수로


개선문



운하에는 꽤 많은 유람선(遊覽船)들이 떠다닌다. 네프스키 대로 못지않게 페테르부르크 교통의 요지가 되고 있는 곳이 운하이다. 수많은 수로(水路)들로 이루어진 이 도시를 편하게 둘러보는 데는 유람선만한 게 없다. 페테르부르크를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코스로 자리 잡은 이유일 것이다. 유람선은 선실 외에도 선미(船尾) 부분에 의자가 놓여있으니 원하는 곳에 앉아 주변 경관을 눈에 담기만 하면 된다.

배가 출발하자마자 가이드의 설명이 시작된다. 페테르부르크란 도시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고통스런 역사이야기다. 황제 즉위 이전 유럽을 돌며 여러 나라에서 문화와 기술을 익힌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의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유럽을 향해 더 가까운 곳으로 옮기고 전 세계에 내세울만한 문화, 예술의 도시를 건설하고자 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도시가 페테르부르크이다. 1703년 표트르 대제에 의해 시작된 새 수도의 건설은 10년에 걸쳐 늪지대 위에 돌을 쌓아 올린다. 당시 이 아름다운 도시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도시 건설에 필요한 커다란 돌을 지참하는 것이 시민권을 부여 받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고 한다. 늪지데 도시를 만들었으니 그 공사가 순탄하게 진행되었을 리가 없다. 공사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고 한다. 그 시신들은 공사의 원활을 기한다는 명목으로 돌들과 함께 늪에 버려졌다. ‘북방의 베네치아’, ‘유럽을 향한 창’, ‘거룩한 베드로(표트르)의 도시등 수많은 수식어의 끝에 꼭 따라다니는 뼈 위에 세운 도시라는 불명예스런 오명(汚名)을 얻게 된 원인이다.

페테르부르크는 101개의 섬 위에 세워진 물의 도시이자 운하의 도시이다. 86개의 강과 운하, 101개의 섬이 365개의 다리(교외까지 포함하면 623)로 연결되어 있다. 운하와 강의 사이사이에 들어앉은 뭍에는 고풍스런 건축물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혁명의 혼란 속에서도 문화재는 물론이고 일반 건물에 이르기까지 페테르부르크 시대의 것을 그대로 보존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시 전체가 박물관인 듯한 느낌을 주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표트르대제와 예카테리나 2세를 거친 후 알렉산드르 1(1801~1825)가 다스리던 시기의 러시아는 유럽의 맹주로 떠오르게 된다. 당연히 건축 수요가 증가하게 되었고, 당시 전 유럽의 유명한 조각가와 건축가들이 페테르부르크로 몰려왔다. 그들의 참여로 유럽을 풍미하던 최고의 양식과 스타일로 변한 도시는 18세기 유럽의 초호화판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뾰쪽한 첨탑이 특징인 고딕양식(Gothic style)과 아케이드(arcade)에 반원형의 아치를 많이 사용한 로마네스크 양식(Romanesque style), 고딕양식의 구조에다 미적 요소를 가미한 르네상스양식Renaissance style), 그리고 르네상스양식이 진화한 바로크 양식(Baroque style) 등 중세유럽을 풍미했던 갖가지 건축기법들을 동원해 지은 옛 건물들이 줄줄이 늘어서있다. 하나같이 독특한 외형을 지닌 아름다운 건축물들이다.

운하의 둑을 따라 고풍스런 건축물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수백, 수천 개의 건물이 모두 저마다 개성과 특색이 있어 보이다. 운하 자체를 살아있는 야외 박물관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눈의 호사가 계속된다. 그래서 유람선 투어를 일러 페테르부르크 관광의 백미(白眉)라고 칭송하는가 보다.

주황색 건물은 파벨 1가 지은 미하일롭스키(Michailovska) 궁전이다. ‘예카테리나 여제표트르 3사이에서 태어난 황제인 파벨 1는 이 자리에 있던 엘리자베타 여제의 여름궁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예카테리나 여제의 권력에 대한 야망 탓에 파벨 1세는 42세의 나이가 되어서야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데, 5년 남짓한 통치기간 중 자신이 태어난 엘리자베타 여제의 여름궁전을 허물고 현재의 미하일롭스키 궁전을 건축했다. 그는 통치 5년 만에 귀족들의 궁정반란으로 살해된다. 그가 살해된 곳 역시 이곳이니 불운한 황제였던 파벨 1세의 생과 사의 역사가 이루어진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러시아 혁명 이후 기계공학대학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한때 기계공대궁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현재는 러시아 박물관 산하의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네바강에 가까워지자 왼편에 넓고 푸른 숲이 나타난다.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의 휴식처인 여름 정원이다. ‘표트르 대제가 살던 소박한 2층짜리 여름 궁전도 이 정원 안에 들어있다. 궁전 안의 실내 장식과 가구가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고 하니 시간이 날 경우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벽 하나를 가득 메울 만큼 커다란 시계도 보게 될 것이다. 아무튼 공원에는 250개나 되는 대리석 조각상(상당수는 그리스의 신화를 모티브)들과 가로수길, 그리고 연못이 조화롭게 잘 배열되어 있다.

네바강에 들어서자 반가운 풍경 하나가 시야(視野)에 잡힌다. ‘삼성기아자동차의 광고판이다. 가이드의 말로는 두 회사가 이루어낸 노력의 결과란다. 러시아의 경제가 어려웠을 당시 이곳 페테르부르크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어느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던 자리에 광고판을 내걸 수 있게 해주었단다. 그래 대한민국 만세다. 저런 기업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교역국에 자리 잡을 수 있었을 게다.

네바 강의 강폭이 넓어지는 곳에 이르면 건너편 저 멀리에 황금빛 첨탑이 나타난다.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 군대를 방어하기 위해 네바강 유역에 구축한 페트로 파블로스키 요새(要塞)’이다. 네바강의 하구 델타지대에 위치한 토끼섬에 지어진 요새로 1706년부터 약 35년이 걸려 완성되었다. 요새를 둘러싼 두꺼운 벽(높이 12미터, 4미터)에는 5개의 문이 만들어져 있다. 6개의 성채 가운데 네바 강으로 향한 나리시킨스키 성채에서는 매일 정오를 알리는 공포를 쏜다고 하니 참조한다. 그건 그렇고 요새가 만들어진 뒤 정작 스웨덴 군대는 단 한 번도 쳐들어온 적이 없었고, 이후 요새는 정치범수용소로 사용됐다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 고리키, 바쿠닌, 트로츠키 등이 이곳을 거쳐 가면서 이 요새는 러시아의 바스티유라는 별명이 붙었다. 감옥(監獄)으로 변한 요새의 첫 죄수는 아이러니하게도 표트르 대제의 아들 알렉세이 황태자였다. 죄명은 반역죄, 아버지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모의했다는 것이다. 표트르는 생존의 위협을 받으면서 황위에 올랐다. 외가는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리고 그는 군인으로 반생을 전장에서 보냈다. 강력한 군주(君主)였지만 대신 남을 잘 믿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전쟁보다 평화를 추구했던 황태자는 유약했다. 계속되는 아버지의 질책에 두려움을 느낀 아들은 결국 러시아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빈을 거쳐 나폴리까지 도망했지만 결국에는 러시아로 끌려올 수밖에 없었다. 표트르는 결국 황태자를 포기한다. 그리고 황제는 황태자를 반역죄로 가뒀다.

뾰쪽하게 솟아오른 황금빛 첨탑은 같은 이름(파블로프스크)의 성당이다.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와 바울을 기념하는 교회로 요새의 이름은 이 건축물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성당은 스위스인 건축가 도메니코 토레지니에 의해 1712년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1733년에 완성되었다. 그 후 종루에 피뢰침이 없어서 몇 번의 화재를 입었는데, 1756년에는 첨탑과 네덜란드 시계가 불타 버린 일도 있다. 1850년대에는 높이 121.8미터의 새로운 첨탑이 세워져 페테르부르크 최고의 건축물이 되었다. 20년이나 걸려서 만든 만큼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역대 로마노프 왕가의 황족들이 묻혀있다. ‘황제의 성당인 셈이다. 황제의 성당답게 넓은 공간에 충분한 빛을 받아들이며 지주, 벽기둥, 대리석으로 된 벽과 다양한 색채의 아치, 그리고 금박을 입힌 석고상과 갖가지 빛깔의 키르시탈 샹들리에 등 어느 것 하나 예술품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한다. 특히 이코노스타시스(iconostasis, 聖像 칸막이)는 떡갈나무를 조각하고 금박을 입혀 장엄함을 강조하고 있단다.

유람선은 토끼(자야치) 바실레오스트롭스키 섬을 이어주는 트로이츠키 다리를 통과한 후 조금 더 올라가다가 방향을 튼다. 더 이상은 볼만한 게 없다는 얘기일 것이다. ‘트로이츠키 다리1897-1903년에 프랑스의 에펠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구스타프 에펠(Alexandre Gustave Eiffel)’이다. 이 다리가 철제(鐵製) 다리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 다리는 페테르부르크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지난 2003년이 300주년이었다니 벌써 100년이 훨씬 넘은 셈이다.

트로이츠키 다리 근처에는 범선(帆船)이 한 척이 정박해 있다. ‘페트롭스키 호위함을 복제(複製)해 만든 것인데, 현재 수상 레스토랑인 '블라고다티(Благодать)'가 문을 열고 있단다. 가이드의 말로는 조금 더 가면 주요 역사유적 가운데 하나인 표트르 대제의 목조 오두막집이 있다고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최초로 지은(1703) 건물인데 표트르는 이 오두막에서 8년 동안을 살면서 수도 건설에 잠심몰두(潛心沒頭)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오두막에 전시된 소박한 거실과 침실, 서재와 식당, 그가 직접 만든 보트 등 유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만든단다. 마지막으로 가이드는 이 오두막이 덮개로 덮여있는데다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어 울타리 뒤에 있는 청동흉상에 주목하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는 주의사항까지 전해준다

높이 32m로스트랄 등대 (Rostal Column)’가 있는 바실레오스트롭스키 섬(Vasilievsky Island)‘, 로스트랄이란 라틴어로 뱃머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해전에서 승리를 기념하여 원주를 세우고 포획한 배의 뱃머리로 기둥을 장식하였던 것에서 그 이름이 유래 되었는데 러시아도 이를 모방하여 해전의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등대다. 러시아가 바이킹 왕국으로 명성을 떨치던 과거 스웨덴과의 해전시 침몰시킨 스웨덴 뱃머리를 잘라다가 등대에 붙여놓은 것이다. 이는 러시아의 국가적 자부심의 표증이자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던 바이킹 해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음을 기념하는 등대다. 등대를 둘러싼 공원과 바다가 만나는 이곳은 신혼부부들의 화보 촬영이나 관광객들 그리고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돌아오는 뱃머리에 서니 자연스레 우리의 한강과 비교가 된다. 네바강은 우리의 한강처럼 물이 많이 흐른다. 강폭도 무척 넓어서 건너편의 건축물들이 조그맣게 보일 정도이다.


네바강 유람선1시간 타고 옵션 50유로 







유람선 위에서



이삭성당을배경으로

성 이사악 성당(러시아어: Исаакиевский собор)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러시아 정교회성당으로 지어질 당시에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지어졌다. 높이 101.52m, 성당의 둥근 천장이 21.83m, 길이가 11.2m, 폭이 97.6m인 이 성당은 64~114톤에 이르는 72개의 거대한 원형의 돌들로 둘러싸고 있다. 1만 4천명을 수용할 수 있다. 원래 명칭은 ‘이사악키이예프스키 사보르’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이 아니라 달마티아의 성 이사악이라는 정교회 성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달마티아의 성 이사악의 축일은 5월 30일인데 바로 그 날이 표트르 대제의 생일이기 때문이다.[1] 웅장한 금빛의 둥근 지붕이 특징인 성 이사악 성당은 현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제정시대 교회의 막강한 권력을 상징하듯 높이도 고층빌딩만해서 먼 곳에서도 잘 보인다. 내부에는 중앙에 있는 카를 브리쵸프의 작품을 비롯하여 성경의 내용과 성인들을 묘사한 예술가들의 그림이 많이 그려져 있다. 그밖에도 수백점의 동상과 부조가 있다


성이삭성당(St. Isaac's Cathedral)

성이삭성당(St. Isaac's Cathedral)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성당  청동의 기마상 맞은편에 위치한 거대한 황금빛 돔은 성이삭의 날인 5월 30일에  태어난 표트르 대제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성 이삭  성당으로,  돔의 크기가 세계에서 세 번째 규모인 101.5m에 이르며 도시의 어느 곳에서도 눈에 쉽게 띄는 건축물이다.  길이 111.2m, 폭 97.6m로  총14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규모의 이 성당은 1818년 몽페란드에 의해 설계된 후 40년이 지나서야 완공되었다.  이 엄청난 공사에는 총40만 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성당을 장식하는 데에는 대리석과 반암, 벽옥 등 40여 가지가  넘는 다양한 석재가 사용되었고, 성당의 내부에는 성서의 내용과 성인을 묘사한 150점이 넘는 러시아 화가들의 회화와 조각품, 12000여개의 조각으로 만들어진 62개의 독특한 모자이크 프레스코화가 전시되어 있다 .  43m에 달하는 교회의 전망대에서는 페테르부르크의 아름다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전망대는 성당 내부로의 입장료와는 별개로 따로 입장권을 구입하여야 한다.


성이삭성당(St. Isaac's Cathedral)

대리석 기둥의 색이 붉은 것은 러시아산 대리석이라고 한다


성이삭성당(St. Isaac's Cathedral)

성 이삭성당의 건설하고 있는 모습의 사진



성이삭성당(St. Isaac's Cathedral)

이 곳의 중안 돔 위의 천정에는 평화의 상징 비둘기의 이콘화가 있었다 카톨릭에서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한다


중간 아치 위의 그리스도상을​ 이탈리아어로​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 세상의 구세주상이라고 한다.

 세계를 상징하는 공을 왼손에 받쳐들고 오른손은 치켜들어 축복을 내리는 모습이다.​  정교회뿐 아니라 르네상스 이래 유럽 전역에서 성화로 자주 써 온 소재라고 한다.



성 이삭성당의 대리석 기둥을 세우는 방법 동영상


평소에는 이 지성소 문을 닫아 두는데 오늘은 열려 있어 지성소 안의 사제들이 머무는 공간인 제단 안과

제단 안쪽 창문 부활하신 예수님의 스태인드글스를 볼 수 있었다.


성이삭성당(St. Isaac's Cathedral)을 배경으로




















그리스도부활교회 (피의 사원)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그리스도 부활 교회로  전통적인 러시아 건축양식중 하나인 모자이크 프레스코로 장식된 그리스도 부활 교회가 피의 사원이다. 알렉산더 2세 암살 기도가 있었던 바로 그 곳에 1883 - 1907년에 걸쳐 세워졌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피의 사원"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교회의 내부는 27년간의 복구 끝에(1907년 첫 개관 이후로 90년후) 드디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그 안에는 알렉산더 2세가 상처를 입었던 정확한 위치가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현란한 모자이크 장식으로 인해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성당의 앞뒤로 아홉 개 돔이 올려져 있고 전면 너비 52m, 높이 81m에 이른다.

 제정 러시아 말기 1883년부터 1907년까지 24년에 걸쳐 황실이 지은 성당이다. 유럽을 모델로 삼아 건설한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부에서 유럽풍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건물 말고 17세기 모스크바공국 시대의 비잔틴 양식이 가미된 러시아 특유의 건축 양식을 간직하고 있다.모스크바의 성 바실리성당을 모델로 삼아 지었다고 한다.

피의 사원(그리스도부활성당)의 외관이 너무 아름 다워 성당을 한바퀴 돌면서 각 방향에서 바라본 사진을 올린다

정면 중앙 박공에 붙어 있는 커다란 모자이크화가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에 머리가 길고 수염을 기른 장년의 그리스도가 오른손은 축복의 표시를 하고 왼손에는 복음을 나타내는 책을 들고 있다.  이런 예수상을  만능의 주(主)를 의미하는 판토크라토르(팬토크레이터)라고 한다. 판토크라토상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엔 세례 요한, 왼쪽엔 성 게오르기(조지)가 무릎을 꿇고서 앉아있다. 성 게오르기 대신 성모가 요한과 함께 인류의 죄를 사면해달라고 청원하는 그림은  데이시스(디시스-Deisis)라고 하는데​ ​성모 자리에 성게오르그가 있는 그림은  매우 드물다고 한다. 성 게오르기는 유럽 뿐만아니라 러시아에까지 성인으로 받는 분이다. 데이시스에 성모 대신 게오르기가 그려져 있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인듯하다

그리스도부활성당(피의 사원)뿐만 아니라 러시아정교회의 내벽에는 수많은 이콘화(성상화)가 그려져 있다


성당안 중앙돔 위에 새겨진 예수님

안렉산드르 2세의 관

경건한 성당에 어울리지 않게  '피의 사원'이라는 별칭이 붙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안렉산드르 2세는 농노제를 폐지해 2000만명을 해방시켜  '해방자 짜르(황제)'라고 불렀던 개혁 군주이다.​

​지방자치제와 배심원 사법제도까지 진보적 제도를 정착시켰다.​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 정치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 유럽 유학을 다녀온 청 년 장교들의 군사 혁명이 실패한 이래 러시아엔 꾸준히 자유를 갈망하는 사회 개혁 움직임이 일었고  1870년대엔 인민해방 운동과 직업적 혁명가들이 등장합니다.

운동가 그룹 중에 '인민의 의지'라는 급진 혁명운동 조직이  1881년 아침 알렉산드르 2세가 마차를 타고 산책 나왔다가 입헌군주제 도입 방안에 서명하러 궁으로 돌아가던 길목에서 짜르(황제)를 습격한다 ​ 조직원 두 명은 이곳 그리보예도프 운하 곁을 지나던 알렉산드르2세의 마차에 수류탄을 던진다.

마차가 심하게 흔들렸지만 황제는 다치지 않았고 마차에서 내려 범인을 꾸짖는다.

그 사이 다른 한 명이 폭탄을 터뜨려 자신은 죽고 황제에게 중상을 입힌다.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옮겨졌지만 몇 시간 뒤 숨을 거두고 만다. ​

아들 알렉산드르 3세가 아버지를 추모해 아버지가 피 흘린 피습 장소에 세운 것이  그리스도부활성당이자 '피 위에 선 교회' 피의 사원이라고 한다.

피의 사원 중앙 정면에 위한 지성소의 문그 위의 돔 안에 그리스도부활 이콘화가 그려져 있다

천정에 매달린 화려한 샹들리에






또 다른 천정 돔 안의 이분이 바로 성 게오르기성인이다

피의 구세주 성당

피의 구세주 성당

피의 구세주 성당

카잔성당





넵스킨대로


다음편에는 모스코바로 간다